안녕하세요?
어제 한 형제님이 진정한 우정이라는 사진을 보내면서 다음의 글을 주셨습니다.
"목사님, 웃자고 보냅니다."
"상황이 좀 우습긴 하지만. 저 아이들처럼 서로 의지하고 배려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목사님. 힘내시고~~ 홧팅하세요. ^^"
이 한 장의 사진이 웃음도 주고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 주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주일에 한 번 모이지만 질적으로 우수한 예배를 드리고
또 끈끈한 우정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려면 가능한 한 지역 모임과 소그룹 모임이 활성화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주일 오후에도 예배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하며 교제하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우정이 넘치는 우리 교회를 꿈꾸면서
샬롬
패스터
2014-02-26 09:16:37 | 관리자
우리의 구원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근간입니다.
이를 위해 히브리서 6장과 10장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사이트의 기사로 읽는 것도 좋지만 가능하면 PDF 파일을 다운받아 인쇄해서
성경과 비교해 가면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한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끝으로 소책자를 읽고 모든 것을 요약해서 머리에 넣기 바랍니다.
요즘 구원 취소 교리로 성도들을 불안하게 하는 자들이 많기에 정신을 가다듬고
부랴부랴 이 글을 적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2014-02-20 15:00:32 | 관리자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히브리서 6장, 10장 설명)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606
히브리서 배경
1. 요즘 구원이 취소된다는 교리를 가지고 성도들을 현혹시키는 자들이 많다. 이들이 이런 이단 교리를 가르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구절이 바로 히브리서 6장 4-8절과 10장 26-27절이다. 이런 악한 교리로 인해 고통당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기에 이 글에서는 성경을 통해 바른 교리를 정립하고자 한다.
2. 성경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문의 수신자와 문맥이다. 이런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이 히브리서 구절들 역시 수신자와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는 초대 교회가 형성될 때 예수님을 믿게 된 유대인(히브리) 성도들이다. 이 당시에는 여전히 유대교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유대인 교사들은 기독교로 회심한 이 형제들에게 손을 뻗어 그들을 다시 유대교로 복귀시키려고 노력하였다.
3. 이에 히브리서 기록자인 사도 바울은 유대인 교사들의 악한 주장을 무력화하기 위해 먼저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의 천사와 모세와 여호수아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레위의 제사장 체계와 그 안의 모든 희생물보다 우월함을 증명한다. 이것을 확증하기 위해 사도는 율법의 의식 법들이 제정된 목적과 용례를 보여 주고 이제는 그것들이 그리스도라는 실체가 옴으로써 완전히 폐기되었음을 논리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사도는 극심한 핍박을 당하는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당하는 것을 참으라고 권면하면서 배도의 물결에 휘말리지 말 것을 촉구한다. 그러면서 사도는 구약시대 영웅들의 믿음 열전을 보여 주며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동일한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우리의 참 소망이 하늘에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4. 이 히브리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던 때에 그분을 믿은 자들에 의해 주님께 인도된 자들이었다(히2:3). 이들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해 안으로는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밖으로는 로마 제국에 의해 극심한 핍박을 받으면서(히10:32-34; 12;4; 13:13-14) 믿음의 진보를 거의 이루지 못하고 성화의 삶을 포기한 채 영적으로 답보 상태에 있었다(히6:1). 이들은 또한 거짓 교리들에 유혹을 받았고(히13:9) 처음에 자기들에게 진리를 바르게 가르쳐 준 사람들을 차츰 잊어버리는 상태에 빠져 있었으며(히13:7), 그중에는 심지어 예배에 나오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히10:25).
5. 이런 위험에 빠진 히브리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들이 이런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면 비록 구원은 잃지 않지만 하나님의 징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히12:5-11; 고전3:11-17).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의 구원자가 누구인가?”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다시 믿음을 평가한 뒤 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전진해 나가라고 권면한다(히12:12-13).
6. 이 점들을 기억하면서 히브리서 6장과 10장을 문맥에 따라 살펴보면, 이 난해 구절들이 사실 구원 취소가 아니라 보상의 취소와 징계를 가르치는 말씀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히브리서 6장 배경 설명
1. 사도는 5장에서 구약시대의 대제사장들과 신약시대의 유일한 대제사장 예수님을 비교하며 설명한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이 구약시대 대제사장들과 달리 아론(레위)의 계열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르는 대제사장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을 하면서 5장 11절에서 사도는 과연 이 히브리 성도들이 영적으로 미숙하여 자기가 설명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들을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진다. 그래서 그는 5장 12-14절에서 그들이 시간상으로 보아 마땅히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무를 이해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아직도 젖을 빠는 아기들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 준다.
2. 이것을 지적한 뒤 사도는 6장 1-3절에서 이제는 그들이 이런 미숙한 상태를 벗어나 완전함(성숙함)에 이르러야 한다고 권면한다. 바로 이런 문맥의 흐름에서 저 유명한 4-8절 말씀이 연이어 나온다.
히브리서 6장 4-8절 설명
히브리서 6장을 전체적으로 문맥에 따라 살펴보면 이 구절들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음에 대해 말하지 않음을 금세 알 수 있다. 본문에서 발견되는 사도 바울의 진정한 의도는 침체 상태에 빠져 있는 이 히브리 성도들을 일깨우려고 충격 요법을 사용한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히6:4-8과 히10:26-39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살펴보고 이 구절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님]께 참여한 자가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 6 만일 떨어져 나가면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니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느니라. 7 자기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땅을 가는 자들에게 합당한 채소를 내는 땅은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니와 8 가시와 찔레를 내는 것은 버려지고 저주함에 가까이 있어 마지막에는 그것이 불살라지리라.
1.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여기서 사도는 구원받은 자들이 믿다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 지옥에 가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들은 완전히 배도하여 옛 생활로 돌아갔으므로 구원을 잃고 영원히 구원을 잃게 된다.”
a. 이것은 감리교회, 성결교회, 오순절/은사주의 순복음 교회 등과 같이 ‘알미니안 주의’를 견지하는 자들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짧게 ‘구원 취소 교리’로 알려져 있으며, 대표적으로 서울 ‘큰 믿음 교회’의 변OO 목사, 연세중앙교회의 윤OO 목사, 서울 순복음교회의 조OO 목사 같은 유명(?) 목사들이 이런 교리를 주장한다. 이들 외에도 7년 환난 통과 교리를 주장하는 이들의 대부분 -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카페와 거기서 소개하는 데이비드 O, 벤자민 O 등의 목사들 - 이 이 교리를 주장하면서 신부 단장 연습, 주님의 군대 가입 등을 통해 행위로 믿음을 유지할 것을 가르친다.
b.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영원한 안전 보장 교리와 전적으로 배치된다. 히브리서 자체가 이를 증언한다.
(1)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히5:9). (2)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다(히7:25). (3)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구속이다(히9:12). (4) 우리는 영원한 상속 유업을 받는다(히9:15).(5)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다(히13:5-6).
c. 또한 성경은 여러 곳에서 구원이 취소될 수 없음을 명백하게 말한다.(1) 우리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5:24). (2) 아무도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서 성도들을 빼앗을 수 없다(요10:20). (3) 이 세상 어떤 창조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낼 수 없다(롬8:28-39).
d. 아이러니하게 구원 취소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또한 구원을 잃은 뒤에 다시 회복될 수 있음을 말하지만 6절은 그리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한다. 즉, 구원을 잃었다가 다시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2.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은 이 구절들을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이 히브리 성도들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한다. 즉, 그들은 말로는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 역시 전혀 설득력이 없다.
a. 이들은 ‘한 번’ 빛을 받은 자들이다(히6:4). 여기의 ‘한 번’은 사실 ‘영원한 한 번’을 말한다. 히브리서의 ‘한 번’의 용례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한 번’은 ‘영원한 한 번’이다(히7:27; 9:12, 26-28; 10:10 등).
b. 이들은 하늘의 선물을 맛보았다(6:4).
c.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보았다(6:5).
d. 이런 주장을 펴는 자들은, 이 히브리 성도들이 구원받지 않았음을 강변하기 위해 그들이 구원을 맛보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맛보다’라는 말은 실제로 먹는 것을 뜻한다. 히2:9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셨다고 기록한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은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죽지는 않았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제로 죽음을 맛보고 죽으셨다. 그러므로 ‘맛보다’는 표현은 실제로 맛보고 먹었다는 뜻이다. 벧전2:2의 ‘맛보다’도 같은 뜻이다.
e. 이들은 성령님에게 참여한 자들이다(6:4). 히3:1은 이들을 가리켜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하면서 이들이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이라고 하며 히3:14는 이들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들이라고 한다.
f. 이런 것들로 보아 이들은 분명히 구원받은 자들이다.
g. 구원받지 않은 불신자들이 어떻게 주님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을 모욕할 수 있겠는가?(6절) 불신자들은 항상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항상 그분을 모욕하지 새로이 하지는 않는다.
3. 어떤 이들은 이런 죄가 히브리서가 기록된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예루살렘에 성전이 서 있을 때까지만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왜 사도는 지금 영적 성숙과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무를 연결하고 있는가? 히브리 성도들은 지금 영적으로 미숙해서 사도가 이야기하는 ‘하늘에서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일은 지금도 미숙한 성도들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지금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면, 성경에 기록된 이런 권면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4.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이 7년 환난기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럭크맨(Peter Ruckman)을 추종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주장이다. 히12:23을 보면 이들은 교회에 속한 자들이므로 히브리서를 환난기의 유대인들에게만 적용하려는 시도는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5. 그러면 이 구절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6절의 ‘if’와 9절의 ‘But’과 ‘though’이다. 이것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문제를 푸는 핵심이다.
a. 사도 바울은 복지부동의 자세를 고집하는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 충격을 가하기 위해 가정법을 사용해 구원받는 자는 구원이 아니라 보상을 잃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히6:9-10이 이를 증명한다. 이것은 잠시 후에 9-10절을 보여 주면서 설명할 것이다. 사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이런 가정법을 사용한 적이 있다. “육체에 따른 내 형제들, 내 친족들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랄 수도 있으리니”(롬9:3). 자기 육신의 친족인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면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받기를 바랄 수도 있다고 고백했다. 이 말의 본래 의도는 유대인들의 구원을 애타게 바라는 바울의 심정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결코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알듯, 가정법은 화자(話者)의 간절한 의도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비현실적인 가정을 통해 극적으로 표현되는 서법이다.
b. 히6:3까지 사도는 자기를 포함하여 ‘우리’(we, us)라는 표현을 쓰다가 4절부터는 갑자기 ‘우리’ 대신 ‘자들’(those)로 주체를 바꾼다(우리말 성경에서는 5절). 즉, 지금 그는 무언가를 가정하려 하고 있다. “For it is impossible for those who were once enlightened…”
c. 히브리서를 바로 이해하려면 ‘우리’가 누구인지 잘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의 ‘우리’는 사도 바울과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을 가리킨다(히1:2-3; 2:1; 3:1, 14; 4:14; 4:16…12:1-2, 28-29; 13:6, 15). 이것은 너무나도 명확하므로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d. 구원 취소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이 애용하는 히10:26-27도 ‘우리’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면 쉽고 바르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먼저 19-25절을 살펴보자.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는데 20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께서 우리에게 계시므로 22 우리 마음이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우리 몸은 순수한 물로 씻겼으니 우리가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23 (약속하신 분께서 신실하시니)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굳게 잡고 24 서로를 살펴보아 사랑과 선한 행위에 이르도록 격려하며 25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말고 서로 권면하되 그 날이 다가옴을 너희가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e. 히10:19-25의 ‘우리’는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몸은 순수한 물로 씻긴 자들이다. 그래서 사도는 자기를 포함한 이 히브리 성도들이 즉 ‘우리’가 모이는 일을 폐하는 어떤 자들과 같이 모이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문맥에 따라 이 구절을 읽으면 ‘우리’는 바로 바울을 포함한 구원받은 자들임을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구절 뒤에 유명한 26-27절이 나온다. “26 우리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받은 뒤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남아 있지 아니하고 27 대적들을 삼킬 심판과 불 같은 격노에 대하여 두렵게 기다리는 어떤 일만 남아 있느니라.”
f. 그러면 히10:26의 ‘우리’ 즉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받은 뒤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남아 있지 않고 불 같은 격노를 두렵게 기다려야만 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여기서도 사실 사도는 ‘if’를 사용하여 가정하고 있다.) 어쨌든지 문맥에서 분명한 것은 여기의 ‘우리’가 바로 위에 있는 히10:19-25의 ‘우리’라는 점이다. 즉, 여기의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히브리서 10장 19-17절을 통합적으로 보아야지 26-27절만을 따로 떼어 문맥에 상관없이 해석하면 안 된다. 구원 취소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이 애용하는 히10:26-27의 ‘우리’는 히브리서 전체와 10장에서 보듯이 분명히 사도 바울을 포함한 구원받은 자들이다.
g. 그런데 이 사람들이 고의로 죄를 짓지 않으려면 믿음의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만 한다(23절). 그리하지 않으면 히10:28에 있듯이 구원은 받았어도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인해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었거늘”(히10:28).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어린양의 피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다(고전10:1-5). 이집트 탈출은 성경에서 항상 구원을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구원받은 자들 중에서도 고라와 그의 무리들(민16장) 또 나답과 아비후처럼(민3:4) 모세의 율법을 멸시하다가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사도는 히브리 성도들이 더 이상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면 심지어 육체의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육체의 죽음을 뜻하지 구원의 상실을 뜻하지 않는다.
h. 구원받은 뒤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히브리서의 교훈은 히10:34-35에 있다. 즉 성도들이 확신을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의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확신을 버리고 말씀을 저버리면 보상의 손실을 입고(고전3:12-17) 더 심한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i. 그러므로 이들은 구원은 받았지만 보상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 자들이다.
j. 신약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인들도 (육체적)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요일5:16-17; 고전5:5; 딤전1:19-20; 딤후2:16-17; 요삼9-10).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니니야와 삽비라이다. 이들은 구원받았지만 성령님을 속이려 들다가 즉사하였다. 심지어 고린도 교회에서도 주의 만찬을 멸시하다가 죽은 자들이 있었다(고전11:28-30).
k. 결론적으로 히브리서는 - 특히 6장과 10장 - 결코 성도가 구원을 잃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l. 히브리서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성도들은 미숙한 상태에서 벗어나서 완전함으로/성숙함으로 나아가야 한다(벧후3:18). 그리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징계하신다(히10:30; 12:5-11). 또한 성도가 극심한 죄를 지으면 신구약의 여러 사례에서처럼 곧바로 죽이기도 하신다.”
6. 히브리서 6장은 산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열매)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에베소서 2장 8-10절이 가르치는 바이다. “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0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7. 사도는 4-6절에서 충격 요법인 가정법을 사용하여 구원받은 자들이 떨어져 나가면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7-8절은 4-6절과 동일한 맥락으로서 땅이 열매를 맺지 못하면 불태워짐을 말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이 불로 태워져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무엇이 불타 없어지는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 등이지 땅 자체가 아니다. 땅은 남아 있다. 즉 비록 불살라지는 저주를 받을지언정 땅 자체는 남아 있다. 이것은 고전3:13-16절을 그대로 다시 표현한 것이다.
8. 이제 끝으로 우리는 “히브리서 수신자인 이 히브리 성도들은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는 올바른 질문이다. 반면에 “이 히브리 성도들은 구원을 잃는가? 잃지 않는가?”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9절과 10절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9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비록 우리가 이같이 말하지만 너희에 관한 더 좋은 것들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자신의 이름을 위해 너희가 보여 준 너희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성도들을 섬겨 온 것과 또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느니라.”
9. 먼저 9절이 ‘그러나’로 시작됨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는 앞에 있는 것과 완전히 반대를 가리키는 역접 접속사이다. 즉, 9절에서 사도는 앞의 4-8절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을 말하려고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구절을 시작한다. 또한 사도는 앞에서 가정법을 써서 그들에게 있지 않을 일을 이야기하였음을 보여 주기 위해 “비록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만”이라는 양보 구절을 사용한다. 즉, 내가 앞에서 그렇게 심하게 가정하여 말을 했지만 그게 너희와는 실제로 상관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 그는 “너희에 관한 더 좋은 것들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이 히브리 성도들에게는 구원뿐만 아니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 즉 열매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열매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는 10절에서 그들에게 구원 이후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가 있었음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이 히브리 성도들은 땅(구원)도 좋고 그 위에 열매 즉 믿음의 행위도 내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결코 구원을 잃을 수 없으며 보상도 받는다. 다만 지금 그들이 믿음의 답보 상태에 있으므로 이대로 가면 앞으로 더 받을 수 있는 보상을 받지 못할 위험에 처해 있기에 사도는 이들을 자극하여 완전함으로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10. 그래서 사도는 11-12절에서 열심을 내어 너희가 끝까지 소망의 충만한 확신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11 우리는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열심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충만한 확신에 이르기를 바라노니 12 이것은 너희가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인내를 통해 약속들을 상속받는 자들을 따르는 자들이 되게 하려 함이라.” 즉, 사도는 그들이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어 많은 보상을 받기 바랐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결코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미 구원은 끝났다. 12절에서도 사도는 그들이 확실하게 인내하여 구원이 아니라 ‘보상의 약속들’을 상속받으라고 주문하다.
11. 그리고 앞부분이 보상에 대한 내용임을 확증하기 위해 사도는 13-15절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 14절 말씀 즉 “내가 반드시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창22:16-17에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약속은 무슨 약속인가? 구원에 대한 약속인가? 아니면 구원 이후의 상속에 대한 약속인가? 아브라함의 구원은 이미 창15:6에서 끝났다. 여기의 약속은 분명히 그의 씨가 번성하게 될 것에 대한 약속이다. 즉, 보상에 대한 것이다.
12. 아브라함은 끈질기게 견딘 뒤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자손들이 번성하는 복을 받았다. 그는 75세에 자손들의 복을 약속받았고(창12:1-5), 그 이후에 24년을 약속의 자식 없이 떠돌아다니다가(창17:1-6), 100세에 가서야 이삭을 유일한 아들로 받았다(창21:1-5). 실제로 그는 자기 자손이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음을 보지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리스도의 날 보기를 기뻐하다고 그 날을 보고 즐거워하였다(요8:56). 즉, 그는 육체적 후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한 영적 후손들까지 다 보았다. 그가 이처럼 상속의 소망을 - 구원이 아니다 - 받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사도는 히브리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인내하라고 말한다.
13. 결론적으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 6장과 10장에서 구원이 아니라 보상의 소망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어야 히브리서 6장 1-3절의 권면 즉 완전함으로, 성숙함으로 나아가라는 사도의 권면이 문맥상으로 딱 들어맞게 된다.
성경 문제
1. 위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6장과 10장이 구원 취소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상의 손실과 징계를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6장에서 개역성경은 구원 취소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에게 그럴듯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2. 먼저 4-6절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if를 사용한 가정법 문장이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가정법의 ‘if’(만일 …하면)를 없애고 6절에서 아예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개역 히6:6). 즉, 개역성경은 ‘if’를 없앰으로써 아예 히브리 성도들을 타락한 자들로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 배교의 결정판이라고 하는 NIV도 6절에서 ‘if’는 그대로 살려놓았다. NKJV, Amplified Bible 등도 다 6절에 ‘if’를 제대로 달아놓았다. 개역성경이 이런 오류를 범한 것은 ASV(NASB의 모체)를 대본으로 사용하여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ASV와 NASB는 개역성경처럼 ‘if’가 없고 ‘타락한 자들의 경우에는’으로 되어 있다.
3. 그 뒤 개역성경은 9절에 치명적인 오류를 만들어 놓았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개역 히6:9). 일단 9절 처음에 ‘그러나’가 나오면서 문장이 역전됨을 보여야 하는데 개역성경은 ‘그러나’를 없앴다. 참고로 NKJV, ASV, NASB, Amplified Bible 등도 다 ‘그러나’로 시작한다. 그리고 개역성경은 ‘though’를 단순히 뒤에 ‘말하나’로 번역하여 뜻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개역성경은 “우리는 너희가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로 번역하였다. 그들이 구원에 가깝다면 그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면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원도 받지 못한 자들의 행위와 수고를 잊지 않고 기억하신단 말인가? 이것은 실로 말이 안 되는 번역이다. NKJV, ASV, NASB, NIV 역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처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그들에게 있다”라고 바르게 번역하였다. 다만 카톨릭 성경인 Amplified Bible만 ‘구원에 가까운’이라는 절을 삽입하여 놓았다. 즉, 이런 번역은 구원을 평생 과정으로 이해하는 로마 카톨릭 주의의 산물이다.
4. 이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예가 바로 벧전2:2이다.
흠정역: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개역(ASV, NASB, Amplified Bible 등):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5. 개역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고 말하면서 구원이 평생 과정임을 보여 준다. 이런 성경으로는 구원을 받았다가도 언제라도 잃을 수 있다는 구원 취소 교리가 얼마든지 가능하며 무지한 성도들은 이런 성경과 그 안의 가르침으로 인해 평생토록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두려움 가운데 벌벌 떨면서 살게 된다. 이렇게 두려움의 불씨를 품고 사는 자들에게 개역성경의 빌립보서 2장 12절은 기름을 부으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6. 성경이 두렵고 떨면서 구원을 이루어가라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꼼짝없이 교회와 교단과 목사의 말에 순종하면서 두려움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개역성경을 사용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주소이다. 그러나 바른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흠정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7. 이미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미 얻은 구원을 가지고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밖으로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요점이다. 여기서 영어는 ‘work out your own salvation’이라고 말한다. 요즘 우리는 ‘워크아웃’(work out) 기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잘 나가던 회사의 재무 상태가 나빠지면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회사가 일하는 것을 감독하고 채찍질하는 것을 워크아웃이라고 한다. 즉, 기업의 경우든 성도의 경우든 워크아웃은 기업이나 구원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을 하여 외부로 무언가를 드러내어 보여 주는 것을 뜻한다.
8. 이런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성경 번역이 믿음 생활에 대단히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가 성경 때문에 잘못되면 이로 이한 피해는 고스란히 애꿎은 성도들이 당해야 한다. 사실 구원 취소 같은 이단 교리를 가르치는 이들도 잘못된 성경의 희생자라고 볼 수 있다.
성도가 구원을 잃을 수 없는 몇 가지 이유
1. 사람의 힘으로 얻지 못한다(엡2:8-10; 딤2:14).2. 한 가지 죄를 지으면 모든 죄를 지은 것과 같다(약2:10). 그러므로 무슨 죄든 죄로 인해 구원을 잃는다면 구원을 유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즉 우리의 행위가 구원에 일조하지 못하듯이 우리의 행위는 또한 구원 유지에도 일조하지 못한다. 3. 예수님의 단번 속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속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4. 구원은 출생이므로 출생이 여러 번 있을 수 없다.5. 구원은 영원한 생명, 영존하는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인데(롬8:14-17; 31-39), 이런 영원한 생명과 영존하는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에게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하며 영존하기 때문이다.6. 우리는 구속의 날까지 성령님에 의해 봉인되어 있다(엡5:30; 고전12:18). 이 세상의 어떤 창조물도 성령님을 이기고 그분의 봉인을 풀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영원하다.7. 구원을 잃는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요일5:10).
이 글과 함께 <구원의 기쁨과 확신> 소책자를 참조하면 구원의 기초가 확실히 놓일 줄 믿는다.
2014-02-20 15:00:12 | 관리자
도움이 되었습니다. 좋은 지식 감사합니다. ^^
2014-02-18 16:35:32 | 김상진
안녕하세요?
바른 교회들이 제대로 성장하려면 글을 잘 쓰는 지체들과
잘 쓴 글을 가지고 설교나 성경 강해를 잘하는 지체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다음은 어떤 분이 전달해 준 글쓰기 요령입니다.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아 올립니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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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요령: <짧고, 정확하고, 쉽게, 그리고 많이 써야> 좋은 글쓰기의 일반 원리 1. 글을 잘 쓰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글쓰기의 두려움도 없어진다. 2. 명문(名文)보다는 ‘정확하고 쉬우며 짧은’문장이 더 좋다. 3. 수식어보다는 명사와 동사를 많이 써야. 4. 무엇을 쓸 것인가. 글의 주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5. 낱말의 중복을 최소화한다. 글도 경제적이라야 한다.6. 모든 글은 30%를 줄일 수 있다. 압축해야 폭발력이 생긴다. 7. 글의 리듬을 맞추자. 글을 써놓고 소리 내어 읽어본다.8. 한자를 적소에 섞어 쓰면 읽기 쉽고 이해가 빠르다.9. 긴 글엔 긴장이 유지되어야 하고 흐름이 있어야 한다. 10. 어휘력은 독서의 축적이다. 잘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11. ‘잘 쓰기’보다는 ‘많이 쓰기’이다. 12. 글의 원료는 어휘력과 자료와 생각이다. 13. 글은 즐겁게 써야 한다. 글은 말처럼 인간의 본능이다. 14. 명언, 명문, 명연설집, 그리고 사전류를 곁에 둔다. 제목 달기 1. 제목은 내용의 요약이고, 미끼이며, 주제이다. 2. 제목은 글자 수의 제한을 받는다. 3. 독자들이 읽을까말까를 결정하는 것은 제목을 통해서이다. 4. 제목은 필자가 다는 것이 원칙이나 편집자가 최종적인 권한이 있다. 5. 제목을 뽑는 것은 레이아웃(사진 그림 등) 및 기사비중 결정과 함께 잡지, 신문 편집의 3大 핵심 요소이다. 6. 제목을 보면 신문, 잡지, 기자들의 자질과 안목을 알 수 있다. 7. 제목의 내용이 기사의 등급을 결정한다. 8. 무슨 기사가 중요하고 무슨 기사가 덜 중요하느냐의 판단은 기자의 자기 능력 매김이다. 뉴스밸류 감각이 좋은 기자가 특종을 많이 한다. 9. 제목은 詩(시)이기도 하다. 제목 달기의 각론 가. 제목은 기사를 읽은 직후 그 느낌이 살아 있을 때 뽑아야 한다.나. 제목은 우선 흥미유발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 과장해선 안 되지만 평범해서도 안 된다. 라. 새로운 사실을 부각시켜야 한다. 마. 제목은 구체적이거나 본질적이거나 상징적이다. 바. 단어의 중복이 없어야 한다. 기사도 중복은 허용되지 않는데 하물며 제목에서랴. 사. 말의 묘미를 살려야 한다. 아. 상징적인 낱말 하나가 가장 좋은 제목이 될 수 있다. 자: 대제목과 부제목과 소제목의 역할 분담을 어떻게 할 것인가. 차: 제목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다. 카: 제목으로 모든 것을 다 보여주겠다고 욕심을 내면 안 된다. 독자는 의외로 이해력과 추리력이 높다.
2014-02-17 17:22:52 | 관리자
한 분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낭독한 다른 소스를 알려주셨습니다.
저도 들어가서 들어보니 좋았습니다.
http://audiobiblekjv.org/
그분의 평은 다음과 같으니 참조하기 바랍니다.
들어 보니까 좋은점은
1. 제가 개인적으로 영국영어를 좋아해서 영국발음이어서 좋구요.
2. 목소리리가 볼륨이 크게 녹음이 되어서 소리가 커서, 음역대 범위가 넓어서 좋구요.
3. 구약부분도 알렉산더 스커비처럼 빨리 읽지 않고 신약과 똑같은 속도로 읽어서 좋구요.
4. 목소리가 스커비 보다 단어가 훨씬더 정확하게 들리구요.
5. 목소리도 맑아서 좋구요.
2014-02-10 11:50:50 | 관리자
안녕하세요?
3주 동안 자리를 비웠다가 어제 다시 우리 교회 지체들을 만나니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출장 가 있는 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님들도 바쁘지만 늘 내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교회/믿음 생활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오는 일이 시계추처럼 아무 생각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하나가 되면 큰 불행입니다. 이것은 보통 매너리즘이라고 불립니다. 아무 생각 없이 교회에 오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고 교제하고 나가서 살다가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이 되면 또 오는 일이 반복되면 안 됩니다. 예배 시간에 기도, 찬송 인도, 설교, 간증, 성경 낭독, 특송 등의 순서를 맡은 이들도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합니다. 특별히 온 회중이 같이 부르는 찬송은 예배에서 대단히 중요하니 열정을 다해 뜨겁게 주님께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목사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형식과 틀에서 벗어나 매주 뜨겁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우리 삶의 가장 큰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이번 주에는 민수기 4장부터 24장까지 하루에 3장씩 성경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앞부분은 동일한 것들이 반복되어 지겨울 수 있습니다. 그래도 거기에 기록된 모든 단어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으므로 꾹 참고 읽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올해가 끝나면서 성경을 통독하는 지체들이 여럿 나오기를 원합니다.
2월의 남은 두 주는 제가 여행 중에 느낀 것들을 주제로 설교하고, 3월부터는 사이트에 광고를 올렸듯이 제임스 낙스 목사님의 <가정과 결혼>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저 역시 이 주제에 전문가가 아니므로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교회 사이트에 가셔서 낙스 목사님의 이 책을 PDF 파일로 다운받아 미리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http://new.keepbible.com/Study5/View/3YI
주일 학교의 학생이 85명, 교사가 15명 정도 됩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입니다. 교회 학교에 제안할 것이 있으면 조민수 형제님(010-2048-1919)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아이들이 살게 될 세상은 참으로 사악한 세상이 될 터이므로 아이들을 바르게 양육하는 일에 우리 모두가 힘을 써야겠습니다.
우리가 선교비를 지원하는 한수현(네팔), 홍승현(중국), 윤성목(미국), 김재근, 나영석, 김기찬(한국) 형제님의 사역을 위해 또 광주, 대전, 원주 등에 지역교회가 세워지고 확립되도록 기도해 주세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과 미디어 선교 사역의 확산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고 시간이 날 때마다 대통령과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통일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샬롬
패스터
1 그러므로 내가 권면하노니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중보와 감사를 드리되 2 왕들과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정직한 가운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자 함이라. 3 이것은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의 눈앞에서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딤전2:1-3).
2014-02-10 10:08:24 | 관리자
지난 주 금주 금요일 밤 성경공부 기쁨이 크고 유익하였습니다.
주제와 내용은 잠언 2장 "지혜의 가치"와 레위기 23장 "주의 명절들"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가 사모님 목사님의 출장 일정을 가득 채워지시길 기원합니다.
2014-01-25 00:12:27 | 최상기
출장중에도 강단에 서서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할지를 늘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설교자만 누릴 수 있는 낭만이요 부담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정과 결혼 이란 주제로 설교말씀 들을것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저도 책을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그리고 천동설에 관해서는 저도 얼마전에 누군가 홈피에 올린 글을 읽으며 처음 접했는데 지금까지 알고 배웠던 것에 정반대되는 것이라 놀랍기도 했지만 성경적인 관점으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편에서 보니 천동설이 믿어졌습니다.
40년넘게 진리라고 믿었던 것을 전혀 의심없이 정반대로 믿게하시는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고 멋진 분이신것 같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자료보면서 더 정확하게 알고 싶었었는데 목사님께서 천동설에 관해 연구하신다니 너무 기대가 됩니다.
언젠가 천동설에 관해서 정확하고 자세하게 들려주실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2014-01-24 14:22:27 | 이정희
두분 모두 잘 지내고 계신다는 안부를 들으니 참으로 기쁘고 반갑습니다^^
말씀하신 책을 PDF파일로 읽으며 설교 들을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귀국하시는 날까지 평안 하세요~
2014-01-24 10:40:49 | 이명숙
안녕하세요?
저와 아내는 주님의 은혜와 여러분의 기도 덕분에 출장 여정 속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여기는 눈이 자주 옵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도 목사이기에 앞으로 어떤 것을 설교해야 할지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책들을 읽는 것이 중요하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PDF 파일들을 읽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여러 책 중에 제임스 낙스 목사님의 <가정과 결혼>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http://new.keepbible.com/Study5/View/3YI
다 읽고 나니 마음속에 이 교재를 중심으로 앞으로 주일 오전에 <가정과 결혼> 시리즈로 말씀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크게 들었습니다. 이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저를 누르므로 설교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 목사에게는 하기 쉬운 설교/성경 공부가 있고 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에게나 <가정과 결혼>은 다루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본인과 가족들의 눈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가정과 결혼>에 대한 성경적 메시지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저와 제 아내와 제 가족을 위해 설교한다는 심정으로 - 비록 성경적으로 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이 시리즈 말씀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이 주제에 대해 낙스 목사님이 지은 훌륭한 책이 있으므로 우리 모두가 이 책으로 예습하고 설교를 듣고 복습하면 기쁨이 넘치는 가정생활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이룰지 모두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가정이 좋은 교회를 이룹니다. 반대가 아닙니다. 좋은 교회는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을 100% 보장하지 못합니다. 교회의 행복보다 개인과 가정의 행복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과 가정생활이 교회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여하튼 저 역시 이 책을 다시 읽고 잘 준비해 보려 하니 성도님들도 이 책을 사서 보시든지 PDF 파일을 다운받아 보시면 좋겠습니다.
목사가 왜 남의 책을 중심으로 설교하느냐고 따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혼자 생각해서 설교하는 것보다 다른 분의 책을 중심으로 설교하는 것이 모두에게 더 유익하면 저는 언제라도 그리할 것입니다. 그런 책이 곧 나의 교사요, 인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또한 천동설 문제를 연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주의 기원, 미래, 지구의 위치 등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KBS 인문학당에서 연세대 이석영 교수가 설명하는 빅뱅 우주론을 세 편 보았는데 그분은 그것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이해하지만 저는 창조의 관점에서 이해하니 성경이 얼마나 위대한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하나님은 ‘Great God’이십니다. 이분을 알고 이분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실에 우리 모두 감격해야 합니다.
끝으로 저 역시 회원 가입을 위해 필수 설교 10개를 듣고 있습니다. 몇 개 더 들어야 끝이 납니다. 여러분도 잘하고 계시는지요? 제 설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니 제게도 큰 도전이 됩니다. 이것 역시 설교자의 낭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도님들 모두에게 은혜와 긍휼을 넘치도록 부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4-01-24 01:03:50 | 관리자
매우 간결하게 묘사한 인생의 말씀으로 놓임 받고 싶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라"
하지만 더욱 집착하는 인생 앞에서 자주 갇히고 맙니다.
"탁월함의 최고는 간결함에 있다"
귀한 경구에 다시 사로잡히길 원합니다.
사모님 목사님, 먼 길 평안히 잘 다녀오십시오.
2014-01-18 11:23:35 | 최상기
올해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된 신약교회를 추구하는 우리교회가
교리 뿐 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면에서
사람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따르는
모범적인 교회로 세워지길 바랍니다 ^^
2014-01-16 13:07:56 | 임성희
목사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해주셔서 오히려 속이 시원하고 감사합니다.
저나 남편도 전에 교회에서 해오던 습성이 있어서 출국하시는데 운행이나 배웅을 해야되지 않나 하고 생각했거든요.^^
3주의 긴 여정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2014-01-15 13:08:11 | 이정희
패스터가 너무 매정하게 글을 쓰지 않았나 걱정되었는데 성도들의 진심과 목사의 진심이 사랑의 띠로 매어져 섭섭하거나 당혹스런 느낌은 없었으면 합니다.
매해 해외로 가는 일이 있지만 이번 해는 그동안 겪은 일때문에 저희도 더욱 교회가 애틋합니다.
성도님들의 진심어린 애정에 감사를 드립니다.
2014-01-15 09:50:35 | 오혜미
늘 훌륭하신 글 감사히 새기고 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뵈요.
2014-01-15 08:23:02 | 오영수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주시는 은혜가 풍성하므로 넘치도록
좋은 열매가 많이 맺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건강히 잘 다녀 오시기 바랍니다.
2014-01-14 23:28:22 | 박영학
우리교회의 특성을 아직 잘 모르시거나
이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해오던 관습의 폐해를 버리지 못한 경우 같아요.
찬양도 말하는것도 곧바르게 쓰임새에 맞게 하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존경하는것과 떠받드는 것은 달라도 한참 다르지요.
2014-01-14 23:25:00 | 이수영
항상 이곳에서 소통하실것이니 걱정하지 않습니다. 새삼 이홈피가 고맙네요.
사모님 가족도 만나시고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2014-01-14 22:21:41 | 이청원
이글을 읽으며 생각나는 한마디는 오직 이것뿐 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 합니다..
평안히 잘 다녀오세요~
2014-01-14 21:59:30 | 이명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