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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어제는 솔로몬의 배은망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입니다.지혜와 능력이 많아도 자신을 의지하면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성경은 잘 보여 줍니다. 그래서 성경의 메시지는 매우 단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처럼 다 안다고 하면서 호언장담하고 남을 무시하면 결국 패망에 이릅니다.   이번 주에는 왕상6-왕하4를 읽으면서 솔로몬을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요즘 킵바이블 사이트에서 창조/재창조 논쟁이 일고 있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672   이 논쟁은 편향된 사고로 성경을 보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상식과 이성적 판단을 잃으면 많은 지식이 여러 사람을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매일같이 성경을 탐구하는데 삶의 변화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불신자 이상의 나쁜 언행이 나타납니다.   이런 사람을 보거든 그가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조심하고 속히 물러날 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깃털이 같은 새들이 함께 모인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런 일에 열심을 내는 분들 보면 대개 성격이 거칠고 언행이 안하무인입니다. 목회자의 경우 자기 아내와 가족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 잘 보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저도 자유롭지 못하지만 늘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식의 교만을 드러내며 남을 비하하고 쓸데없는 논쟁을 일삼는 사이트에 들어가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가능하면 좋은 사이트를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신문, 검색을 빼고는 인터넷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1주일에 한두 번 ‘이 세대가 가기 전에’라는 블러그에 들어가 세상의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http://blog.naver.com/esedae/   이 블러그는 일반 교회 목사님이 운영하는 것인데 전 세계의 마귀 숭배 추세를 매우 잘 보여 줍니다. 어떤 때는 너무 과한 면도 있지만 성도들이 거를 것은 거르고 가끔씩 보면 좋은 내용이 많습니다. 특히 세상 욕심이 불현듯 일어나거나 교만한 맘이 생기거나 남을 비하하려는 맘이 생기면 거기의 뉴스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재림의 징조를 보면 그런 악들을 버리고 제대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자동으로 들 것입니다. 저도 어제 지난주의 글들을 보고는 더욱더 바르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도 이렇게 귀한 정보를 매주 업데이트 해 주는 블러그는 거의 없습니다.   여기에 푹 빠지지는 마시고 가끔씩 보면서 경각심을 갖기 바랍니다.   주님의 큰 평안이 넘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4-13 16:47:16 | 관리자
정확하게 교회안에서 부부간의 호칭 문제를 정리해 주시니 너무 좋습니다. 저도 전에 교회에서 15년간 써오던 우리 형제님 이란 호칭이 입에베어서 호칭문제에 조금 어려움이 있었는데 정확하게 정의내려 주시니 앞으로는 정확한 호칭으로 부를수 있겠습니다.
2015-04-13 15:58:51 | 이정희
긴글 잘읽었습니다.^^ 평상시에 느끼고 있던 내용이라서 더욱 공감되고 남존여비의 근본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했는데 역시나 일제의 잔재가 그원인이로군요....앞으로는 더욱 서로를 아끼며 존중하는 부부가 되도록 존대말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4-10 11:52:00 | 김성응
안녕하세요?   지난주에는 제가 성도의 언행에 대해 글을 올렸습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qt&write_id=776   언행이 좋아야 한다는 것은 상스러운 말, 험한 말을 안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쓰는 것도 포함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형제/자매라는 호칭을 쓰다 보니 남편이 무슨 말을 할 때에 “제 자매가 그러더군요.”라고 하거나 자매가 “제 혹은 우리 혹은 우리 집 형제가 그랬어요.”라는 형태의 말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부부가 교회에서 자기 아내와 남편을 가리킬 때 형제/자매 호칭을 쓰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제 아내가 그러더군요.”“제 남편이 그랬어요.”가 자연스럽습니다.   어떤 분은 남편을 높이느라고 사람들 앞에서 극존칭을 쓰곤 합니다.   “제 남편이 그러셨어요.”   이것은 밑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말 오염입니다.   “제 남편이 그랬어요.”로 해야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아내를 하대하면서 이름을 부르거나 반말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 역시 보기에 심히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의 언어 습관을 살펴보고 고치기 위해 ‘아빠와 부인’, ‘아내에게 존댓말을 씁시다’의 두 글을 올립니다. 저도 실천해 보려고 하니 우리 가정에서, 교회에서 해 보도록 합시다.   샬롬   패스터   -----------   ‘아빠’와 ‘부인’ 여성칼럼 (김초혜)   아내가 남편을 가리키는 말로 ‘아빠’가 흔히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분명 잘못 쓰여지고 있음에 대하여 전문가들이 지적한 글을 더러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여성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리 아빠’나 ‘아빠’를 남편에 대한 지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빠’는 호칭이지 지칭이 아니다. 굳이 ‘아빠’를 지칭으로 쓰려면 ‘우리 애 아빠’라고 하거나 ‘우리 돌이 아빠’라고 해야 옳은 국어사용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남편이 자기 아버지가 되어 버리고 자기가 남편의 딸이 되는 망측한 결과가 생긴다.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남편을 존대하는 ‘-하시고’와 함께 여성들의 ‘아빠’ 오용은 국어 파괴와 국어 오염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남편을 존대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좋은 일이나 자기 남편보다 연상인 분 앞에서 남편을 존대하는 것은 더없는 결례고 몰상식한 것이다. 친구 앞에서도 “아빠는 술을 드시느라고 아직 안 들어 오셨어요" 하면 듣기가 매우 민망스럽다.   부부관계 호칭에 있어 여성들만이 국어 파괴 작업에 열성인 것은 아니다. 남성들도 마찬가지로 ‘오염 작업’에 열중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기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부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부인’은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국어는 한 민족의 영혼의 집합이며 정신의 총체이다. 국어의 오용은 단순히 개인적인 무식이나 무교양을 나타내는 것만이 아니라 민족의 혼을 마멸시키고 침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말을 그릇 사용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들이 말을 바르게 사용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평생을 안락하게 해 주는 것은 돈이나 명예일지모르나 한 민족의 장구한 미래는 말을 제대로 지키는 것에서 비롯됨을 잊어서는 알 될 것이다. <시인>   -----------   아내에게 존댓말을 씁시다.   아내에게 존댓말을 씁시다. 어느 사이에 우리나라는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로 말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이 당연한 권리처럼 바뀌었습니다. 제 주변에서 많이 보는 유형은 다음과 같죠. 남편: 누구야. 물 한 잔만 가져와라.아내: 예. 알았어요. 그렇지만 반말 들어서 기분 좋을 아내 한 명도 없습니다. 자신이 남편에게 존댓말을 쓰는 이상 아내도 존댓말을 받고 싶습니다. 부부는 동격이고 0촌간이며, 일심동체니까요. 결혼 전에도 결혼 이후에도 저는 아내에게 존댓말을 씁니다. 극존칭은 아니고 '시'가 가끔 들어가는 '해요'체에 가까운 존댓말입니다. '여보, 물 한 잔만 갖다 주세요.' (또는 '갖다 줘요')'예. 알았어요.' 내외간에 존댓말을 쓰는 것이 당연한데도 신혼부부가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면 이상하게 쳐다봅니다. 반응은 대개 두 가지입니다. 남자: 어? 아내에게 존댓말을 써요? 왜 써요? (신기해서 물어봄. 남자가 왜 아내에게 존댓말을 쓰냐는 표정임.)여자: 어? 남편이 존댓말을 써요? 좋겠다. (부러워서 물어봄. 나도 남편이 존댓말 써주면 좋겠다는 표정임.) 이런 반응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깥에 나가서 아내에게 존댓말을 쓰면 대개는 한 번씩 물어봅니다.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들도 신기해서 물어봅니다. '어머, 부인에게 존댓말을 쓰세요?' 제가 왜 집사람에게 존댓말을 쓸까요? 집사람을 존경하고 존중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존경할 때 아내도 남편을 존경합니다. 그래서 과거부터 우리 조상은 내외간에 존댓말을 썼습니다. 존댓말을 써야 하는 이유는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부부가 동격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쓰던 내외라는 말의 의미부터 동격 아닙니까. 안과 바깥. 우리나라는 100년 전까지 부부 사이에 존댓말을 썼습니다. 서로의 역할과 영역을 존중해주기 때문이죠. 이는 사극에도 그대로 반영됩니다. 사극을 보면 어떻게 나오죠? 대감이 마님에게 '야, 물 한 잔 가져와라'라고 말하던가요? 아닙니다. '여보 마누라, 물 한 잔 갖다 주오.'라고 '하오'체를 쓰거나 '부인 이번에는 포를 보냅시다'와 같이 '시' '합쇼'체를 씁니다. 지체 높은 왕이나 대감, 선비들까지도 아내에게 존댓말을 썼습니다. 아내 역시 남편에게 같은 말투를 썼죠.('대감 이번에는 포를 보냅시다.' '여보 여기 나무 좀 들어 주오') 존댓말을 쓰는 것이 상류층만의 문화일까요? 아닙니다. 일반 서민들도 다 아내에게 존댓말 썼습니다. 대학 시절 공부했던 춘향전 심청전 등은 19세기에 작성된 판본(완판본이나 경판본 등)인데 여기에도 명백하게 부부끼리는 '하오'체로 대화를 나눕니다. '뺑덕 어멈 물 한 잔만 주오.'라고 말하죠. 100년 전까지 우리나라는 아내에게 존댓말을 썼고 아내를 존중한 나라입니다. 유교가 남존여비를 고착화시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불교나 유교, 도교 모두 고대의 무지한 당시 환경으로부터 여성의 지위를 좀더 향상시키기 위해 나온 사상들입니다. 석가모니나 공자, 장자, 주자가 여성은 짓눌러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는 야만적인 현자들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겠죠. 불교는 사성계급이 투철한 인도에서 여자도 출가할 수 있고 성불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남녀평등을 주장한 종교입니다. 유교 역시 인간 존중 사상을 담고 있죠. 유교가 남녀를 동등하게 존중한다는 사실은 정도전의 경국대전으로 확립된 조선 초기 제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까지 딸은 아들과 똑 같이 돌아가면서 부모의 제사를 모셨습니다. 당연히 재산 분할권도 동등하게 가졌죠. 결혼 이후에도 여성이 성을 가지고 있는 이유 역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권리가 무너진 시기는 조선 중기의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입니다. 수십 년간의 전쟁으로 나라와 가정이 파괴되면서 가계 계승에 대한 위기를 느꼈고 이때부터 한 사람 몰아주기가 나타납니다. 그 결과 장자 계승이 주요 흐름으로 자리 잡고, 이때부터 둘째 이하 아들이나 딸들의 권리가 대폭 줄어들죠. 또한 전쟁을 통해 왜구의 못된 문화가 많이 유입되는데 대표적이 것이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다루는 문화입니다. 즉 조선 후기에 남존여비 문화가 널리 퍼지는 부분은 유교 때문이 아니라 왜란을 통해 왜구에게서 도입된 문화의 영향 때문입니다. 하여간 그래도 여전히 부부는 내외지간으로 동격을 형성했고 조선말까지 부부는 상호 존칭을 썼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겪으면서 이 문화가 사그리 사라집니다. 일본의 남존여비 사상이 확실하게 국내에 보급되죠. 그래서 일제 시대부터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반말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의 남존여비 사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를 들죠. 제 선배 여동생이 일본 남자에게 시집갔습니다. 그 여동생이 일본 가서 처음 겪은 상황은 남편의 안하무인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침에 밥상을 차리면 부부가 같이 마주 보고 먹죠. 그런데 일본은 남자가 밥 먹는 동안 여자가 무릎 꿇고 기다립니다.(요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일본도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아주 오래된 이야기도 아닙니다. 80년대 이야기죠.) 이것까지는 좋다 이겁니다. 기가 막힌 것은 남편이라는 작자가 방에 누워 팔로 머리 고이고 TV 보면서 밥을 먹는 겁니다. 우리나라 같은 밥상이 아니라 소반 형태이므로 가능한 일이죠. 이것을 본 여동생 눈에 불이 확 나죠. '감히 아내가 힘들게 밥을 해줬는데... 같이 먹지는 못할망정 누워서 TV 보면서 먹어?' 가만히 있을 한국 여성이 아니죠. 몇 년 뒤에 선배가 갔더니 겸상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_^ 하여간 우리나라의 못된 문화는 일본에서 영향 받은 바가 큽니다. 부부라는 말부터가 그리 좋은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100년 전까지 사용하던 내외(內外)라는 말은 안과 바깥이라는 동등한 말로 구성되었습니다. 반면 부부(夫婦)는 하늘 같은 지아비와 빗자루 들고 청소하는 하녀라는 한자로 구성된 낱말입니다. 아내는 빗자루 들고 청소나 하는 종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죠. 내외와 부부라는 말은 이처럼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부부라는 말이 굳어진 상태이니 어쩔 수 없죠. 말은 사회의 반영인 동시에 사회에 영향을 주는 가장 직접적인 문화 재료입니다. 100년 전까지 우리 선조가 사용한 말은 무엇이든 남을 배려하고 긍정적으로 보는 말이었으며 사람 관계를 평등하게 보려고 했습니다. 형제라는 말은 위아래를 구별해 상하복종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권리도 형이 많이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동기라는 말은 형도 아우도 모두 같은 권리를 가지고 동등하게 대접해야 할 존재로 인식시켜주죠. 그래서 동기라는 말을 사용하던 조선시대에는 형도 아우에게 존댓말을 썼습니다. 이때도 역시 동기간에는 상호 존칭을 썼죠.(사극 봐도 '여보게 아우님. 술 한 잔 하시게'라고 나오죠.) 형제라는 말 역시 일본에서 건너온 말로 동기라는 말을 밀어내고 오늘날 자리 잡았습니다. 일본인은 맹인(눈 먼 사람)이라는 말로 사람이 못 갖춘 것을 드러냈지만 우리 선조는 판수(셈을 잘하는 사람)라고 추켜세웠습니다. 사람이 못 갖추었다고 업신여기지 않고 뛰어난 점을 내세워 긍정적으로 보고자 했죠. 그렇지만 내외, 동기, 판수가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부부, 형제, 맹인이라는 말로 바뀌면서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하고, 형은 동생에게 반말하고, 일반인은 맹인을 눈멀어 아무 것도 못하는 존재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말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부부 간에는 서로 존댓말을 써야 하는 겁니다. 혹은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로 존댓말 쓰면 거리감 느껴지지 않나요?''서로 반말로 하면 동등해지지 않나?' 존댓말 쓴다고 거리감 느껴질 이유 없습니다.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서로 반말 하는 것은 서로 상대방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에게 존댓말을 쓰기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존중받고 사랑받는다는 감정을 늘 가집니다. 반면 반말을 쓰면 똑 같은 말이라도 듣는 환경에 따라 기분 상해 부부싸움으로 발전하고 이혼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가 커피를 쏟았다고 합시다. 그때 제가 기분이 상한 상태라도 존댓말을 쓰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커피 좀 잘 들고 오지 그랬어요. 조심해야죠.' 존댓말을 쓰니 험한 소리를 입에 못 담습니다. 말부터 순화된 말을 쓰게 되죠. 그렇지만 반말을 쓰는 부부의 경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야, 바보야. 커피도 하나 제대로 못 들고 오냐' 보통 때는 '야 바보야.'라는 말이 친근감의 표시로 사용될 수 있지만 반말은 반말입니다. 반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방에게 굴욕감을 느끼게 합니다. 더구나 감정이 서로 상하거나 가라앉은 상태에서는 별 것 아닌 말조차 큰 상처를 주기 마련입니다. 남자가 '야, 바보야. 커피도 하나 제대로 못 들고 오냐'라고 말할 때 여자가 존댓말을 쓰는 환경이라면 굴욕감을 느낄 것이고, 같이 반말을 쓰는 상황이라면 '그러는 너는 실수 안 하냐'고 맞받아치기 쉽죠.둘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둘이 싸우는 장면 한 번 재현해볼까요? [존댓말 부부]'커피 들고 올 때 조심해야죠. 왜 그렇게 실수해요.''하고 싶어서 하나요. 그러는 당신도 가끔 실수 하잖아요.''내가 언제 실수했어요? 나는 당신처럼 실수 잘 안해요.''무슨 소리여요. 당신도 가끔 실수하잖아요.' [반말 부부]'야, 커피도 못 들고 오냐. 너는 왜 그렇게 실수만 하냐.'(일단 '야'로 시작)'야, 나는 뭐 하고 싶어 하냐. 그러는 너도 실수하잖아'(상대방도 '야'로 시작)'뭐야, 내가 언제 실수했어. 나는 너처럼 실수 안 해 임마.''웃기는 소리 하네. 너도 실수하잖아.' 존댓말을 쓰다보면 감정이 상해도 험한 소리가 안 나오게 됩니다. 'xxx놈께서 하셨잖아요.'라는 말이 나올 수 없죠. 그래서 우리 부부는 상대방에게 욕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반말을 하는 부부라면 아마 욕을 자주 하게 될 겁니다. 남자들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바빠서 밥도 못 먹고 들어왔는데 아내가 '밥이 없어서 미안해요. 바깥에서 좀 들고 오시지 그랬어요.'라고 말하는 경우와 '밥 없어. 니가 바깥에서 먹고 왔어야지. 바보야.'라고 듣는 경우가 같을까요? 아내에게 반말로 듣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무지 기분 나쁠 겁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에게 듣는 반말 좋아하는 아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에게 존댓말 써주세요. 오히려 부부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들어줍니다.여자에게 존댓말 어떻게 쓰냐고요? 사실 남자들이 결혼 전에는 여자들에게 존댓말 잘 하지 않나요? 미팅이나 소개팅, 선 볼 때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여자에게 반말 하는 남자들 있나요? '안녕하세요. 김영희라고 해요.''아, 그래. 나는 홍길동인데. 영희 너 직업이 뭐냐?' 처음 본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남자 없겠죠. 아마 다음과 같이 말할 겁니다. '안녕하세요. 김영희라고 해요.''아, 그러세요. 저는 홍길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희씨 직업은 뭡니까?' 소개로 만났다면 대개는 이렇게 동등한 관계에서 상호 존댓말을 쓰면 만납니다.(동아리에서 선후배 관계로 만나는 경우 등은 제외하고) 처음 본 이성에게 서로 존댓말을 쓰는 이유는 서로 인간으로서 인격적인 존중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혼하면 남자는 반말 하고 여자는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바뀝니다. 이 말은 곧 여성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죠.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일제 시대에 들어온 무척 나쁜 문화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반말 하면 나도 반말을 하는 것이 남녀평등이라고 주장하지 마십시오. 서로 반말하는 것은 남녀평등이 아니라 상호 비하 관계일 뿐입니다. 처음 선 본 자리에서 만난 것처럼 결혼 이후에도 서로 존댓말을 쓸 때 인격 평등, 남녀평등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보는 분 중에 앞으로 결혼을 앞두고 있다면 꼭 서로 존댓말을 쓰는 부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는 이미 결혼해서 아내에게 반말을 하는 남편이 있다면 오늘부터라도 아내에게 존댓말 써주기 바랍니다. 혹 이렇게 묻는 사람 있을 겁니다. '그 동안 반말로 했는데... 쑥스럽게 갑자기 어떻게 존댓말을 쓰나.' 아닙니다. 아내하고 제안해보세요. 저는 결혼하고 집사람에게 존댓말을 써야 하는 이유(이 글에서 말한 내용들)를 말하고 서로 존댓말을 쓰자고 제안했습니다. 물론 집사람도 제 제안을 수용했고요. 오늘 집에 가서 아내와 상의해보세요. '여보 이런저런 글을 읽었는데, 우리도 앞으로는 서로 존댓말을 씁시다'라고 말하고 앞으로 존댓말 쓰면 됩니다. 존댓말을 쓰면 부부 관계만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 교육에도 좋습니다. 우선 집에서 반말을 못 듣기 때문에 아이들이 존댓말을 저절로 씁니다. 또한 어른들도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습관이 생겨 아이들의 생각을 존중하게 됩니다. 물론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서로 존댓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남녀는 서로 존댓말을 쓰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며 자랍니다. 남녀의 인격평등 교육은 부부가 서로 존댓말을 쓰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죠.부부 사이에 존댓말을 씀으로써 손해 볼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얻는 것은 많습니다. 부부 사이의 존경과 사랑, 교육 등에서 많은 것을 얻습니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오늘부터라도 존댓말을 쓰자고 아내와 상의하면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 아내에게 존댓말을 써주세요. 자신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아이를 위해서 좋습니다. http://m.blog.naver.com/rainow/40001148931
2015-04-10 09:56:17 | 관리자
안녕하세요?   오늘 성경을 공부하다 보니 좋은 내용이 있어서 글을 드립니다. 위어스비 목사님의 가르침입니다. 에베소서 2:8-10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3개의 일이 나옵니다.  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0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8-9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for us) 행하시는 구원의 일을 보여 줍니다. 10절 초반의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라는 말에서 작품은 원래 workmanship입니다. 이것은 구원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in us) 일하시는 것으로 보통 성화라고 합니다. 그 뒤에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through us) 선한 행위(일)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많이 내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받고 그 뒤에 성화가 있어야 합니다. 성화는 한 마디로 인격의 변화입니다. 인격의 변화가 없으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썩은 일이 나옵니다.   이 인격의 변화를 위해 아브라함은 25년을, 모세는 40년을, 다윗은 13년을, 바울 10년을 고난과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품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 우리가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온라인, 오프라인에서의 우리의 대화가 건전해야 합니다. 한번 우리의 말을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너희 말을 소금으로 간 맞추어 항상 은혜롭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 사람에게 어떻게 마땅히 대답해야 할지 알게 되리라(골4:6). 부패한 대화는 결코 너희 입 밖으로 내지 말고 오직 세워 주는 일에 쓸 좋은 것만을 말하여 그것이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예수님의 말씀을 드립니다.   36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라. 37 네 말들로 네가 의롭게 되며 네 말들로 네가 정죄 받으리라, 하시니라(마12:36-37).   샬롬   패스터 정동수   (*) 참고로 말을 잘하려면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그래서 카톡 등의 SNS를 이용하는 것도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자제해야 합니다. 너무나 쓸데 없는 말들이 오고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신문 기사입니다.   참조하세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4/02/2015040202571.html
2015-04-03 13:36:50 | 관리자
안녕하세요?   광고 드린 대로 언젠가 시간을 내서 리더십 강해를 하려고 합니다. 그때 교과서로 참조할 책은 <사람들이 따르고 싶은 리더의 조건>입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book&write_id=51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부족하기에 성도 여러분과 함께 성장하려고 이런 책을 보고 강해하며 삶을 나누려고 합니다.   다음은 한 형제님이 이 책의 12장과 부록을 요약해 주었습니다.   참조하면 좋겠습니다.   샬롬   리더의 성공 척도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 바울의 생각을 차지한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리더가 키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값진 자산은 사람이다. 대다수 위대한 리더들의 리더십 수완은 멘토의 영향력 덕이다. 그들은 자기가 닮고 싶은 심령의 소유자에게 배운다. 모든 참된 리더는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디모데 같은 영적 자녀들, 자신의 복제품을 주실 때 감사할 줄 안다. 변절과 저버림을 경험하지 않는 리더는 거의 없다. 바울의 반응을 주목하라.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많은 악을 행하였으니 주께서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갚으시기를 원하노라.”<딤후 4:14>. 바울이 디모데에게 당부한 것은 알렉산더를 응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의하라는 것뿐이다. 리더의 자리에 있거나 사역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말씀을 대적하며 우리에게 해를 입히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신실한 교사들을 바보나 거짓말쟁이나 사이비 따위로 보이게 만들어 평판을 더럽힌다. 알렉산더도 데마처럼 바울이 견뎌낸 배반의 살아 있는 예였다.   부록: 참된 리더의 26가지 특성. 1. 리더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2. 리더는 주도권을 행사한다.3. 리더는 건전한 판단력을 구사한다.4. 리더는 권위를 가지고 말한다. 5. 리더는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6. 리더는 낙관적이고 열정적이다. 7. 리더는 절대 기준을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8. 리더는 장애물이 아니라 목표에 집중한다.9. 리더는 본을 보여 능력을 부여한다.10. 리더는 충성심을 심어준다. 11. 리더는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한다. 12. 리더는 깨끗한 양심을 지킨다. 13. 리더는 확실하고 단호하다. 14. 리더는 마음을 바꾸어야 할 때를 안다. 15. 리더는 권위를 남용하지 않는다. 16. 리더는 반대에 부딪힐 때 자기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다. 17. 리더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 확신을 갖는다. 18. 리더는 자신의 한계를 안다. 19. 리더는 칠전팔기의 기백이 있다. 20. 리더는 열정이 있다. 21. 리더는 용감하다. 22. 리더는 영적 분별력이 있다. 23. 리더는 훈련된 사람이다. 24. 리더는 강인한 정신력이 있다. 25. 리더는 위임할 줄 안다.26. 리더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다. 
2015-03-27 14:06:19 | 관리자
안녕하세요?   미국 칙 출판사(www.chick.com)의 대니얼스 형제가 만든 동영상을 올립니다. 시애틀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신 김항수 형제님께서 번역하고 자막을 넣어 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카톡 등으로 보내 주시면 유익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사실인가 음모론인가? (David W. Daniels)- https://youtu.be/MFlTFCda6F0   성경의 지도까지 변개? (David W. Daniels)- https://youtu.be/kPrYow6c2Xs   원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David W. Daniels)- https://youtu.be/fUN24CnbdSc   성경신자인가 짝퉁신자인가? (David W. Daniels)- https://youtu.be/bvM-K12-V6Y
2015-03-25 10:44:59 | 관리자
안녕하세요?   겨울이 다 지나간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날은 쌀쌀합니다.환절기에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란 원래 양들의 사정을 깨닫고 좋은 데로 인도하여 좋은 꼴과 물을 먹이는 목자를 뜻합니다. 부족한 사람이 목사라는 직무를 맡아서 성도 여러분의 개인 사정을 다 알지도 못한 채 목자 노릇을 하려니 종종 마음이 무겁습니다.   물론 제게는 이 일 외에도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도 일차적으로 목사로서 여러분 모두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함을 인정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 전도사님과 집사, 지역 인도자 형제님들이 있으니 필요한 것들을 그분들과 먼저 상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형제님들과 의논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요즘 매주 4편의 강해와 1편의 설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에 비해 이런 일이 제게는 쉽지만 그래도 늘 버겁습니다. 저의 상황이나 환경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바울의 심정으로 전달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최근에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를 강해하며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저 스스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시간을 내셔서 이런 강해들도 들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도(saint)의 의미를 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도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언행에서 맺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저와 함께 그리스도의 거룩함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면 좋겠습니다. 아이들도 함께 하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몸이 아픈 지체들이 있으니 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천의 강미선 자매님은 갑상선 수술받고 회복 중입니다. 의왕의 김진용 형제님은 대장암 치료받고 있습니다.평촌의 강경희 자매님은 다음 주 19일경에 갑상선 수술받을 예정입니다.   암과 같은 큰 병에 걸리면 얼마나 두렵고 또 아프겠습니까? 그분들의 심정을 생각하고 기도해 주세요.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큰 평안(great peace)이 있나니 아무것도 그들을 실족하게 하지 못하리이다(시119:165).   29일 오후부터 질의응답(Q&A) 시간을 오후에 가지려 하니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사이트에 이황로 목사님께서 강의해 주신 근본주의의 역사 1,2를 올렸으니 꼭 보시기 바랍니다.   근본주의 역사 01http://new.cbck.org/Broadcast5/View/4WC   근본주의 역사 02http://new.cbck.org/Broadcast5/View/4WB   믿음의 여정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922   늘 교회 학교 교사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오늘도 한 걸음씩 내딛는 인생의 발자국이 주님 안에서 평강의 발자국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5-03-14 12:11:14 | 관리자
목사님의 초심이 변치않길 기도드립니다. 실제로 뵙고 더욱 확신할 수 있었고 풍성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을 알게 되어 저희 가족은 너무나 기쁩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주안에서 평강이 깃드시길 기도드립니다.
2015-03-02 16:17:17 | 노경옥
링크된 글 중 "번역자는 해석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에 깊은 공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성경 신자가 계속해서 배출되기 위해서는 성경의 단어들을 중립적인 단어로 가능한 한 초지일관 동일하게 번역한 성경이 있어야 한다" 는 성경 번역의 철학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2-26 15:27:17 | 한원규
안녕하세요?   며칠 전에 한 분이 창세기 1장 1절을 왜 "태초"로 번역하지 않고 "처음"으로 번역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성경 번역의 철학에 대한 것으로 중요한 이슈이기에 잠시 설명하려 합니다.   다음을 참조하세요.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6&write_id=502   샬롬 패스터
2015-02-25 18:28:32 | 관리자
존 맥아더 목사님의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추종자가 없으면 리더가 될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리더쉽이 단순히 '종의 리더쉽' 만이 아닌 '영향력'임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내용 잘 요약해 주신 이상걸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2015-02-19 11:36:13 | 한원규
안녕하세요?   산본에서 오시는 이상걸 형제님께서 『사람들이 따르고 싶은 리더의 조건』 (존 맥아더, 디모데) 중에서 중요 대목을 요약해 주셨습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book&write_id=51&page=10&page=10   교회의 리더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님들을 위해 올리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성도님들에게 유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샬롬   패스터   ------------------   그리스도를 자신의 리더로 알고 리더십의 최고 모델로 삼는 리더들은 종의 마음을 품게 되며 희생의 본을 보이게 된다.하나님 앞에서 리더로서의 자신의 책임을 바로 이해하면, 왜 예수님이 리더를 종으로 묘사하셨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이 리더십의 본질로 오직 낮아짐만을 말씀하셨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겸손하고 온유하며 자상하고 종의 마음을 지녔어도 리더는 아닌 사람들도 많다. 참된 리더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친다. 따르는 사람이 없다면 리더라 하기 어렵다.   따라서 리더십에 종의 마음이 요구되는 것은 분명히 맞지만 종의 마음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리더인 것은 절대 아니다. 리더십은 훨씬 그 이상이다. 간단히 말해서 리더십은 영향력이다. 이상적인 리더란 자신의 삶과 성품으로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여 따르게 하는 사람이다. 가장 훌륭한 리더십의 권위는 단지 위신이나 성격이나 직함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바른 모범의 위력에서 나온다. 진정한 리더십은 외적인 압력이나 강요가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마음에 호소함으로써 사람들의 동기를 유발한다. 이 모든 이유로, 리더십은 스타일이나 테크닉이라기보다 성품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닮은 리더십에는 방법론 훨씬 이상의 것이 있다. 재차 말하지만, 참된 영적 리더십의 관건은 스타일이 아니라 성품이다.   • 리더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리더는 어떻게 신뢰를 구축할까? 힘닿는 대로 상대의 유익을 도모하고 상대에게 해가 될 일은 전혀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을 때, 사람들은 리더를 신뢰하게 된다. 리더는 자신의 성공과 자기 유익에만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아니다. 참된 리더는 상대의 유익에 가장 많이 신경을 쓰고 있음을 주변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는 사람이다. 진짜 리더는 주변 모든 사람의 성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그의 열정은 자기 리더십 하에 있는 사람들이 잘되도록 돕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리더는 종의 마음을 품어야만 한다. 자기의 만족이나 이득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참 리더일 수 없다. 동기가 이기적인 사람들은 결국 모두에게 버림받고 아무도 이끌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신뢰를 주지 못한다. 리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믿어 줄 때만 성공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나 돈, 심지어 생명까지 그에게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신뢰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무것도 없다. 믿을 수 없는 리더는 참 리더가 아니다. 진정한 리더를 쉽게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그의 주변에는 재능 있고 유능하며 근면하고 능률적이면서 동시에 리더에게 헌신적인 사람들이 있다. 신뢰가 그런 헌신으로 나타난다. 신뢰란 경건한 지도자가 자신의 에너지와 능력을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방식으로 사용할 때 싹튼다. 진심으로 상대의 유익을 생각하고 있음을 보일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따를 것이다.   • 리더는 주도권을 행사한다. 그는 위험을 인식했고 그것을 명확히 지적했다. 그는 아무 지위도 없었다. 특별한 권리도 없었다. 직함도 없었다. 권위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문제를 보았다. 그래서 주도적으로 나서서 상황을 명쾌히 밝히려 했다. 이것이 리더십이다. 리더는 위기 상황에서 주도적으로 일어난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 사업을 어떻게 이끌었는지 살펴보자. 그는 문제를 파악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의 약속을 주장했고, 예루살렘 재건에 자기를 써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다음 그는 해결책을 마련했다. 그는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법을 알았다. 그는 신중한 기획가였다. 전체 사업을 심사숙고하며 난점들을 예상하고 미리 해결책을 찾아냈다. 즉흥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일단 벌여놓고 도중에 때워나간 것도 아니었다. 그는 신중히 비용을 계산했다. 치밀한 계획을 세웠고 그대로 밀고 나갔다. 이 모두가 주도권을 취하려는 그의 각오에서 나왔다. 훌륭한 주도권은 모든 기초가 다져지고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즉 숙명의 끝까지 가는 것이다. 이는 딜레마의 해답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원안부터 성취까지 주도권을 이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시동을 거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사람들을 조직하고 동원하여 여정 끝까지 추진하는 능력만이 참된 리더의 ‘착수’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책임을 위임했다. 그는 믿을 만한 사람들을 세워 구역별로 노동을 감독하게 했고. 각자의 능력에 따라 책임을 나눠 주었다. 그는 사람들의 동기를 유발할 줄 알았다. 그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자신의 비전을 나누었다. 그리고 어째서 그 목표가 달성 가능한지 설명했다. 느헤미야 자신의 말로 내 위에 선하게 임한 [하나님]의 손과 또 왕이 내게 하신 말씀을 고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보게 해주었다. 이일의 영적 중요성을 보여 주었다. 그는 진실했고 믿을 만했다. 그는 사람들과 나란히 일했다. 느헤미야는 수동적인 리더가 아니었다. 훌륭한 리더는 절대 수동적이지 않다. 그들은 자기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 느헤미야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여느 누구처럼 부지런히 일했다. 그는 자기 손을 더럽히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그는 포기할 줄 몰랐다. 일에 혼신을 다했다. 느헤미야는 유능한 리더의 전형이다. 그는 선도자였다. 강한 동기를 갖고 있었다. 추종자들을 조직하고 동기를 불어넣을 줄 알았다. 장애물을 극복했다. 그는 실제적이고 지혜롭고 과단성이 있었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면서 사고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유능한 리더십에 꼭 필요한 자질들이다. 그것이 한데 어우러져 느헤미야는 두려움 없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사람이 되었고 사도 바울도 그런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성공 비결이 거기 있다.   • 리더는 건전한 판단력을 구사한다. 훌륭한 리더들은 분석한다. 그들은 위험을 신중히 평가하고 우발적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둔다. 재난이 예상되는데 출구가 없다면 밀어붙이지 않는다.   • 리더는 권위를 가지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께 안전의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확신했다. 그는 하나님이 여전히 바람을 주관하고 계심을 알았다. 그래서 바울은 지극히 담대하게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었다. 그의 놀라운 확신은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을 지키시리라는 확실한 사실에서 나왔다.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할 수 없느니라.”(딤후 2:13) 훌륭한 리더들이 권위를 가지고 말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들이 그저 권위적인 태도로 말한다는 뜻이 아니다. 거드름과 거만은 권위와 다르다. 바울의 남다른 태연함에는 오만하거나 건방진 태도가 전혀 없었다. 그것은 우월감이나 우쭐함이나 자만심의 발로가 아니었다. 바울의 말에 묻어난 놀라운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이며 그분의 약속은 믿을 수 있다는 절대적인 확신에서 나온 부동의 권위였다. 참된 리더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그래서 그렇게 담대히 말할 수 있다. 무엇이 사실인지 알기 때문에 확신과 권위를 가지고 말한다. 참된 리더에게는 확실히 보인다. 바울은 하나님 그분의 권위를 입고 있었다.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살아 있고 권능 있는 음성이다. 게다가 믿는 사람들의 경우, 내주하시는 성령이 조명해 주신다. 바울은 성경을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했다. 그분의 생각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 그분의 생각은 성령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한다. 모든 그리스도인 리더는 세상의 어떤 리더보다 훨씬 가진 것이 많다. 하나님의 진리가 있고, 우리의 교사이신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리더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고, 그 확신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자신 있게 당당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권위의 목소리에는 힘과 위엄이 담겨 있어야 한다. 자기가 하려는 말을 잘 모르면, 명확히 말하거나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없다. 지식에 근거한 확신과 소신과 용기를 말로 표현 할 수 없다면, 사람들을 이끌기가 매우 어렵다.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 성경적이고 영적 리더심이 다른 모든 종류의 리더십과 다른 점이다. 우리의 권위가 마나님의 말씀의 불변하는 진리에서 오는 한 우리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권위를 찾고 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권위가 있게 전하는 사람을 따른다. 진리를 알거든 권위가 있게 말하라! 참된 리더십은 그렇게 한다.   • 리더는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진짜 리더의 목표는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더 나아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그들을 더 강하고 더 능률적이며 더 의욕적인 사람이 되게 해준다.   • 리더는 낙관적이고 열정적이다. 낙관적 열정은 따르는 사람들에게 감화를 준다. 사람들은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리더를 따르게 되어 있다.유능한 리더이면서 동시에 비관적일 수는 없다. 낙관적 열정은 에너지와 흥분과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우리야말로 세상 누구보다도 마땅히 낙관적이고 열정적이어야 한다. 참된 리더십은 위기 속에서 시험을 거치고 검증된다. 진짜 리더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당황하고 혼란에 빠져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참 리더는 문제를 해결하고 짐을 지며 해답을 찾아내고 승리를 이루어낸다.   • 리더는 절대 기준을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도덕적 윤리적 기초, 성경의 절대 기준, 하나님 말씀의 자명한 워리,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 하나님 자신의 진실성 등 원칙의 문제에 관한 한 타협은 절대로 옳지 않다. 참된 리더는 그것을 알며, 물러서지 말아야 할 선을 안다. 진짜 리더는 무엇이 절대적인 기준이고 무엇이 타협할 수 있는지 분명히 안다. 그들은 정말 중요한 원칙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영적 리더의 경우, 절대적인 기준들은 하나님 말씀으로 세워진다. 리더로서 당신의 진짜 지질을 시험해줄 원리는 이것이다.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깨닫고 그 절대 권위에 타협을 거부하지 않는 한 누구도 참으로 훌륭한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없다.   • 리더는 장애물이 아니라 목표에 집중한다. 그는 풍랑 너머의 긴박한 순간을 내다보았고, 닥쳐올 시련을 위해 모두 준비해야 함을 알았다. 모두가 다 여전히 장애물을 보고 있을 때 바울의 시선은 목표에 고정되어 있었다.   • 리더는 본을 보여 능력을 부여한다. 바울은 선원들의 육적인 필요는 무시한 채 영적인 필요에 대해서만 강의하지 않았다. 그는 영적인 면과 육적인 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었다. 그리고 자기부터 먹기 시작하여 모두에게 본을 보였다.   • 리더는 충성심을 심어준다. 충성심은 리더십의 필수 요소다. 현명한 리더는 자신부터 충성심 - 주님께 대한 충성심, 진리에 대한 충성심, 자기가 이끄는 사람들에 대한 충성심 - 을 보여 충성심을 불러일으킨다. 리더가 자신의 충성심을 타협하는 것만큼 리더십을 망치는 것은 없다. 리더십의 요체는 동기를 부여하여 따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더십의 모든 것은 리더와 그의 사람들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 리더십은 신뢰에 달려 있고 신뢰를 길러주는 것은 충성심이다. 신뢰가 싹트고 존중의 태도가 유지되는 곳에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봉사가 이루어진다.   • 리더는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한다. 공감이란 상대가 느끼는 것을 자신도 느낄 정도로 다른 사람과 동일시하는 능력을 말한다. 공감은 참된 긍휼, 민감성, 이해심, 위로에 꼭 필요한 요소다. 리더는 사람들에게 실패의 여지를 주어야 한다.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멸시가 아니라 격려다.   • 리더는 깨끗한 양심을 지킨다. 훌륭한 리더십은 성품의 문제이며 의로운 성품은 건강한 양심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마라.   • 리더는 확실하고 단호하다. 훌륭한 리더는 명쾌한 사고와 적극적인 자세로 단호한 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또 강한 어조로 뚜렷하고 명료하게 목표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어디까지나 리더는 이끄는 사람이다. 리더는 방향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 리더는 마음을 바꾸어야 할 때를 안다. 훌륭한 리더는 잘못된 결정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 훌륭한 리더는 상황에 맞출 때를 알아야 한다.   • 리더는 권위를 남용하지 않는다. 리더는 온유와 긍휼과 공감과 겸손을 잃지 않는다. 리더가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 원망을 품거나 불만을 쌓아두거나 모질어지면 리더다운 영향력을 잃고 만다.   • 리더는 반대에 부딪힐 때 자기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다. 모든 리더가 결국 깨닫게 되는 한 가지 진리는 사람들은 기막힐 정도로 변덕이 심하다는 것이다.리더십의 능력은 영향력으로 측정됨을 잊지 마라. 어떤 사람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 아주 깊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본질상 리더다.   • 리더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 확신을 가진다. 소명 의식이 확실치 않은 사람들은 리더가 될 수 없다. 자기회의만큼 리더십을 무력하게 하는 것은 없다. 자신의 은사와 소명에 분명한 확신이 있으면 아무리 혹독한 시련이 와도 자신의 필생의 사역에 대해 회의에 빠지지 않는다. 유능한 리더십은 그런 의연함, 용기, 배짱, 결연함에 달려 있다.   • 리더는 자신의 한계를 안다.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기억하며 오히려 힘을 얻었다. 그런 약점들 덕에 하나님의 능력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간적인 자원이 바닥날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 흘렀다. 하나님,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바울의 만족의 유일한 참 근원이었다. 유능한 리더는 자신의 자격 조건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려 안달하지 않는다. 참으로 유능한 리더들이 그런 자격이 있는 것은 그들의 성품 때문이다. 추천서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소명을 확신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참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존재임을 아는 사람들이다.모든 리더는 기껏해야 질그릇이다. 하나님이 평범하고 볼품없는 질그릇을 쓰지 않으신다면 영적 리더는 한 사람도 있을 수 없다. 평범한 질그릇들을 쓰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확연히 부각시켜 나타내신다. 하나님이 그런 볼품없는 질그릇들로 영적 리더들을 삼으실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분의 크신 능력의 증거다.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온다.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비켜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더는 자신의 약점을 잘 알면서도 강하고 튼튼해야 한다. 약한 가운데 강한 것보다 더 철저히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없다.   • 리더에게는 칠전팔기의 기백이 있다. 그리스도께 신실한 리더라면 누구나 이런 고난을 피할 수 없다.시련과 고뇌와 고통을 친구로 그리고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상기시켜주는 도구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 의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분을 위하여 보다 유능한 리더와 증인이 된다. 죽어가는 우리에게서 그분의 생명이 흘러나온다.   • 리더는 열정이 있다. 영적 리더는 진리를 향한 열렬한 격정은 물론 그리스도를 향한 깊고 강렬하며 변치 않는 사랑에 이끌려야 한다.   • 리더는 용감하다. 기본 소신에 대한 용기가 없는 사람은 유능한 리더가 될 수 없다. 사람들은 겁쟁이를 따르지 않는다. 때로 리더의 용기는 대결로 표현된다.   • 리더는 영적 분별력이 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진리의 장비들이다. 하나님의 말씀, 복음, 건전한 교리, 성경의 진리다.단순한 사실이지만, 영적 전쟁은 무슨 주문이나 암호로는 싸울 수 없다. 귀신(?)들은 그저 고함을 질러 제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그 일은 주님이 하시도록 맡겨두라. 내가 악령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원할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나 나는 귀신들의 요새인 거짓을 방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할 말이 많다. 그 거짖을 허물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 영적 전투란 한마디로 진리로 악한 거짓을 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복음의 능력을 갖추고 사람들에게 진리를 주라. 허위라는 견고한 진을 파하는 것은 그것이다. 이것이 영적 전투의 요체다.영적 리더십의 기본 자격 가운데 하나는 진리를 아는 지식, 거짓을 식별하는 능력, 진리를 사용하여 거짓을 논박하는 기술이다. 거짓은 오직 진리에만 항복한다. 진리가 이길 때 반역은 끝난다.   • 리더는 훈련된 사람이다. 무슨 일이든 끝까지 성공하려면 절대적 절제가 필요하다. 영향력 있는 진짜 리더는 스스로 훈련에 힘써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살려내는 사람이다. 이기려는 본능이 없는 사람은 유능한 리더가 되지 못한다.진정한 성공은 언제나 비싼 대가를 치르고 찾아온다.   • 리더는 강한 정신력이 있다. 그리스도인 리더는 목표를 바라보며 인내로 전심전력하여 달려야 한다. 이는 훈련의 원리와 완벽한 짝을 이룬다. 리더의 필수불가결하며 가장 첫째 자격으로 하나같이 꼽고 있는 요건은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더란 비난의 여지 없이 진실하다는 평판을 얻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 리더는 위임할 줄 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뜻 위임할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결정하는가? 자신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기도,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것, 봉사 사역 순서...리더십의 관건은 성품, 즉 도의심, 예도, 정직, 충실, 거룩함, 도덕적 순결, 기타 그와 같은 자질들이다.이 모든 덕목을 합하여 마지막 한 문장으로 압출할 수 있다. 참된 리더의 모든 자격요건이 이로써 완성되고 완벽하게 요약된다. 리더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다. 참된 리더십의 완벽한 모델은 물론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분 앞에서 행여 조금이라도 자신이 부족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전체 요지를 놓친 것이다.
2015-02-18 12:32:09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