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 후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요한계시록 말씀을 기억하여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저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2017-08-11 21:03:28 | 김상희
안녕하세요?
교회 밖의 한 분이 뮤지컬 <요한계시록1> 관람 후기를 보내 주셔서 소개합니다.
좋은 내용의 뮤지컬 같아 소개합니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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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입니까-뮤지컬 <요한계시록1> 관람 후기- 전O지
1. 복잡한 서울을 떠나 경기도 읍 단위 시골로 이사 온 지 한 달이 되었다. 그동안 도시의 콘크리트 벽에 갇힌 채 일에 바빠 자연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온 나에게 집 주변의 푸른 숲, 그 사이를 재잘거리며 날아다니는 새들의 우아한 날갯짓은 큰 기쁨을 선사했다. 그게 너무 좋아서 일하다 말고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곤 했었는데 이 꿈결 같던 자연과의 밀월이 불과 한 달 만에 깨졌다.
다른 식물에 기어 올라타 군림하는 조폭 같은 덩굴류들(환삼덩굴, 칡덩굴, 가시박 등) 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푸른 것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었다. 인정사정없이 휘감고 올라가 세력을 형성한 덩굴에 파묻히면 원래 무슨 나무였는지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큰 나무들이야 어떻게든 버텨낸다고 하지만 작은 식물들은 자기를 뒤덮은 무거운 덩굴들을 견디면서 살아가기가 무척 힘겨울 것 같아 안쓰러웠다. 작은 나무들의 숨가빠하는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식물계에도 경쟁이 있어 힘 센 녀석들은 약한 것들을 꼼짝 못하게 덮어버리는데 덩굴손에 한번 걸렸다 하면 생존 자체가 어려워진다.
특히 가시박 같은 외래종 덩굴류는 생존력과 번식력이 왕성해 무차별적으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는데 천적도 없고 땅 속에 종자은행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무슨 수로도 제거하기가 어렵다. 오죽하면 ‘식물 생태계의 저승사자’라고 불리며, 생태교란식물로 지정되었을까.
모든 존재는 각기 제 나름의 목적과 이유가 있지만 나는 상생의 수준을 넘어서는 이것들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일단 이것들에게 뒤덮이면 식물의 자기 정체성이 흐려져 무슨 식물인지 식별이 어렵고, 자기 고유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영양분을 빼앗기고 햇빛도 차단돼 광합성이 어려워 꽃도 못 피우고 열매도 못 맺는다. 그러면 그 잎과 열매를 먹고 살던 곤충도 떠나고, 그 곤충을 먹고살던 새들도 떠난다. 자생식물들이 경쟁에서 우월한 가시덩굴에 점령당해 하얗게 병들고 잘 자라지 못하고 끝내 말라 죽으면 생물 다양성이 훼손된다. 그러면 생태계가 파괴된다.
물론 가시덩굴들에 저항하다 보면 뿌리를 더 깊이 내리고 자생력이 길러질 수도 있겠고, 성분의 효능이라든지 내가 알지 못하는 유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약한 다른 식물들에게 해는 끼치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에 덩굴식물들이 미워진 것이다. 게다가 식물들도 병을 앓고, 해충들에게 시달리며, 인간문명이 주는 공해로 인해 몸살을 앓는다. 이렇게 식물계도 나름의 애환들이 있어 마치 인간의 삶의 단면을 보는 것만 같고, 로마서에서 언급한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이 느껴져 자연을 대하는 내 마음이 그저 편치만은 않았던 것이다.
평화롭던 에덴에 사탄이 틈타 죄가 들어온 이후에 인간과 함께 땅도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났고, 그런 것이 나도록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이 땅을 뒤덮고 점점 자기 왕국의 세력을 확장시켜나가는 것을 보면서 다음세대의 영혼을 장악해가고 있는 세상의 악한 문화들이 오버랩되어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꼈다.
특별히 이 시대 청소년들의 영혼을 잠식하는 것은 미디어다. 미디어의 배후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영들이 있다. 하나님의 성령은 미디어를 통해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가까이하게 만들지만 이 시대에 바벨론(세상) 문화를 리드하는 악한 영은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이 시대의 사탄은 고난과 핍박이라는 무기보다 문화라는 도구를 더 많이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린다. 그래서 그 전략의 하나로 미디어를 사용해 온전히 하나님께 초점 맞추고 마음중심을 드려야 할 우리의 마음과 시간을 빼앗아가고 정신을 산만하게 만든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 다른 것 다 못해도 오직 신랑을 향한 사랑만 있으면 1등 신부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마땅히 있어야 할 마음의 자리에 세상의 정신이 밀고 들어오면 그 신부는 신부로서의 가장 고결한 가치인 순결함을 잃은 것이다. 이런 세상의 바벨론 문화에 대한 대안은 건전한 기독교 문화를 일으키는 일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 전용극장 ‘광야(光野)’는 사탄의 악한 문화적 공격에 대한 대항마의 하나다.
2. 뮤지컬 <요한계시록1>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6장의 7대 재앙, 그리고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의 사랑이야기를 연결하여 다루며 바벨론(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왕국)의 영향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교회)가 종말의 시대에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고난과 유혹들과 함께 어떻게 그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지를 시사한다. 재미도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우며, 종말을 사는 성도의 자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신앙을 정비할 수 있는 좋은 뮤지컬이다.
위대한 왕 샤다이(전능자)가 말 쿠트 샤마임 왕국(하나님나라)을 세운다. 평화롭던 왕국에 벨리앙(사탄 벨리알)의 반란이 일어나 백성들은 눈이 멀어 더 이상 왕과 왕국의 찬란함을 볼 수 없게 된다. 사랑의 왕 샤다이는 그들을 비참에서 건지고자 하나뿐인 아들 아도나이 왕자를 그들에게 보냈지만 백성들은 그를 몰라보고 오직 한 여인 ‘에클레시아(교회, 성도)’만이 그를 사랑하게 된다. 아도나이 왕자는 죄악과 탐욕에 눈 먼 백성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지만 죽음을 이기고 다시 에클레시아의 앞에 나타났다가,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샤다이 왕의 곁으로 돌아간다.
홀로 남게 된 에클레시아는 아도나이가 보낸 심부름꾼 파라클레이토스(성령님)와 함께 과일 장사를 하며, 아도나이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바벨론(사단이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세상나라)의 일곱 도시(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순회하며 좋은 소식을 전한다.
그들이 처음 간 곳은 에베소였다. 진리를 사수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첫사랑을 잃어버린 곳이다. 그들은 스스로 아도나이가 전한 진리를 철저히 지켜내고 있다고 자부하며 “We are solid!”를 외치지만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정죄하다보니 사랑을 잃었다.
이 시대 교회는 많은 일을 하지만 사랑하지 못한다. 파라는 그들에게 “사랑하나요? 정말 사랑하나요?”라고 묻는다. 공의와 사랑은 균형 있게 가야 하며,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요구하시는 것이 일이 아닌 사랑임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두아디라에 갔을 때 에클레시아는 벨리앙의 유혹을 받아 세상의 문화에 물들어 아도나이의 신부로서의 정체성을 잃는다.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꾸미는 것을 기뻐하는 우상숭배자들이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쾌락과 향락을 누리며 믿는 이세벨의 가르침을 관용과 사랑의 미음으로 용납하였다. 벨리앙에게 미혹되어 순결을 흐린 에클레시아는 두아디라 출신으로 빌립보 교회의 창립멤버가 된 루디아를 통해 다시 돌이킨다. 믿음의 선배와 또래가 신앙의 지지대 역할을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하나님께서 내 주변에 붙여주신 귀한 지체들이 고마워졌다.
버가모에 가 보니 안디바라는 충성된 증인이 심문을 받고 있다. 디도라바는 안디바와 같이 갇혔었으나 벨리알의 회유에 넘어가 세상 욕망에 넘어간 발람처럼 말씀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세상을 즐기며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 이미 구원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 모든 말씀이 비유로 되어 있다, 어머니 하나님이 있다, 예수님과 세상을 겸하여 숭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단의 교주들이 등장해 성도를 미혹한다. 종말의 때에 이단과 거짓교훈에 속을 위험을 시사한다.
에클레시아와 파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하리오스(‘순결’이라는 뜻)가 나타나 사데로 이들을 이끈다. 그러나 사데는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과 같은 교회다. 사데교회처럼 한국교회도 명성에 비해 내용이 없다. 나 자신도 남이 아는 나와 내 실상의 갭이 엄청날 거라고 생각한다. 주님의 책망을 받지 않을까 두렵다. 뮤지컬 요한계시록에서 그린 사데교회 교인들은 평안과 안전한 신앙생활을 추구한다. 요즘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안전과 평안을 추구하며 교회 안에서 자기들만의 리그에 갇혀 있다고 비판받는데 교회에 다니면서도 아는 사람들과만 교제하는 나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빌라델비아에서는 시사적인 이슈를 다룬다. 동성애부부의 웨딩케이크 제작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거액의 벌금형을 받고 동성애자들에게 공격받는 빵집 주인 부부가 등장해 정말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나?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오히려 성도가 소수가 되어 역차별을 당하는 이 종말의 시대에 성도가 말씀을 지키기 위해 겪게 될 고난들을 시사한다. 주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다. 죄가 인권으로 둔갑한 이 시대에 동성결혼과 동성애 합법화를 비롯한 포괄적 차별금지법 등 하나님의 진리를 훼손하는 것들이 법제화될 것 같은 기세다. 아마도 종말의 때에 고난이 닥치면 신사참배처럼 국법이라고 정당화하며 혼합주의화되어 고난을 피해갈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도 고난의 때에 불이익을 감수하며 고난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잘 지킬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부요한 자라 좋은 옷을 입고 풍족한 중에 “No problem!”을 외치지만 실상은 눈멀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는 영혼들이다. 하나님이 주신 부요로 인해 교만해지고 안 믿는 것과 방불한 교양 수준의 미지근한 믿음을 주님이 책망하신다. 부요한 이 시대에 하나님나라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없이 적당히 안락한 삶을 즐기며 스스로 만족해 신앙생활에 아무 문제를 안 느끼며 살아가는 이 시대 성도들을 비판한다.
서머나에서는 서머나 교회를 핍박하던 세상의 권력을 군대로 상징하여 나타냈다. Pax Babylon은 세상나라 바벨론의 거짓평화를 말한다. 바벨론은 국가의 법 등으로 성도를 위협할 수 있다. 바벨론의 무기와 미끼는 돈, 권력, 지위, 성(性), 지식 등이다.
여기서 바벨론 문화에 굴복하지 않은 폴리캅 주교가 화형을 당한다. 사랑은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죽음처럼 강하다. 참으로 이 시대의 문화는 때로는 군대의 강력한 명령의 형태로, 때로는 온갖 좋고 아름다운 것들로 동화되기를 요구한다. 바벨론의 정신과 세상의 악한 문화들에 저항하며 사는 길은 순교자의 길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교회와 성도를 상징하는 에클레시아는 일곱 교회의 순례를 마친다. 그녀는 오랜 기다림에 지쳐 잠이 들기도 하고, 아도나이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소망이 흔들릴 때는 그의 사랑을 의심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하고, 세상의 유혹에 빠져 세속화되기도 하고, 자기를 찾아온 아도나이를 몰라보고 떠나보내기도 한다. 그때마다 파라는 그런 에클레시아에게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아도나이의 편지(성경)를 가지고 읽어주며 그의 변함없고 신실한 사랑을 일깨워준다. 때로는 요한계시록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잘 풀어서 가르쳐주기도 하며, 책망도 하고 때로는 위로하고 격려하고 권면도 하면서 에클레시아가 아도나이를 기다리며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돕는다.
3. 요한계시록은 먼 미래의 일만이 아니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도 기록하고 있다. 종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시작되었다. 일곱 교회는 이 시대의 교회이며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일곱 도시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이며, 일곱 도시에서 직면하는 삶과 믿음의 문제들은 곧 우리의 문제다. 주님이 일곱 교회에 하신 말씀은 이 시대에 우리 자신들과 교회를 향해 주신 말씀이다. 주님이 일곱 교회에 하신 공통적인 말씀은 잘 이기라는 것이다. 이기면 상급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 종말의 때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신부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첫째, 깨어있음이다. 주님은 기름을 준비하라고 하시지 않고 깨어있으라고 하셨다. 깨어있는 신부란 자신이 할 일이 언제 올지 모르는 그 신랑을 기다리는 일이며, 오셨을 때 혼인잔치를 밝혀야 하는 일임을 늘 상기하는 자이다. 그런데 교회에 잘 다니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신랑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교회에 잘 다니는 것이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스스로는 준비를 잘 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그날에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드러난 미련한 다섯 처녀에 속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운 마음으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둘째, 분별력을 통한 순결함이다. 사단은 교활한 속임수의 귀재다. 오늘날 세상의 문화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팍스바벨론의 형태로 우리에게 세속화를 요구하기도 하고, 강력한 매력을 지닌 모습으로 온갖 미끼를 던지며 달콤하게 미혹하기도 한다.
세상을 점령한 이 바벨론 정신은 이미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있어 우리가 겸하여 섬길 때가 많다. 신부는 이것이 결국 장차 망할 바벨론으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하며 세상의 스피릿에 물들지 않는 순결함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세속으로부터 자기를 지켜 정결하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사모하며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쓰며,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분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받게 되는 고난을 성령으로 이기며 살아가는 것이 종말을 사는 성도의 바른 자세이다. 그런 성도가 주님 보시기에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신부일 것이다. 그 신부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서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2017-08-10 15:44:43 | 관리자
좋은 교회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
안녕하세요?
지난주에 데이빗 클라우드의 교회에 대한 책을 보았습니다. 500쪽이 넘는 책인데 신약 교회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THE DISCIPLING CHURCH: THE CHURCH THAT WILL STAND UNTIL JESUS COMES https://www.wayoflife.org/publications/books/the-discipling-church.php
다음은 목차입니다.목차만 보아도 우리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독립침례교회의 붕괴
제자 삼는 교회인가, 혼합주의 교회인가?
좋은 교회가 사라지고 있다
좋은 교회는 구원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하며 시작된다.
좋은 교회는 교회 회원권을 지키기 위해 주의를 기울인다.
좋은 교회는 올바른 지도자들이 있다.
좋은 교회는 설교자를 훈련/양육한다.
좋은 교회는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좋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강하다.
좋은 교회는 기도에 강하다.
좋은 교회는 책망하는 교회이다.
좋은 교회는 지도자와 사역자에 대한 규율이 있는 교회이다.
좋은 교회는 적절히 교육하는 교회이다.
좋은 교회는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이다.
좋은 교회는 성경적 분리를 실천하는 교회이다.
좋은 교회는 음악에 주의를 기울인다.
좋은 교회는 열심히 일하는 교회이다.
좋은 교회는 경건한 가정들을 세운다.
좋은 교회는 청년들을 제자 삼는다.
좋은 교회는 세계 선교 비전을 갖는다.
좋은 교회는 그리스도를 향한 첫 사랑을 갖는다.
좋은 교회를 처음부터 세우는 방법
교회를 좋은 교회 회중으로 회복하는 방법
약화되는 교회의 문화적 요인들
좋은 교회의 특징들
좋은 교회를 위한 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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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으로 투병하는 정수영 형제님, 메니에르 귓병으로 고생하는 정관영 형제님, 뇌출혈로 수술 받으신 이수영 자매님 부친을 위해 특별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하는 공간에 이름을 적어 놓고 기도하면 도움이 됩니다.
남윤수 자매님 모친 한숙향 어르신 장례에 적극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주도 금요 모임 없고 다음 주부터 금요일 저녁 8시에 재개합니다.
국가의 안보가 크게 위협받고 있으니 생각날 때마나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 애를 쓰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샬롬
패스터
2017-08-08 10:48:10 | 관리자
물도 고여 있으면 썩듯이 교회도 정체되어 있으면 퇴보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늘 하나님을 향해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2017-08-08 07:38:17 | 심경아
요즘 교회들의 문제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목사나 교인의 불완전성만 강조하여 모든 비리를 덮고 가려는 경향이 크다고 봅니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없다고 변명합니다. 틀린말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불완전함 가운데 맡겨진 삶에서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말씀하신 것처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17-08-07 08:29:10 | 조성재
안녕하세요?
오늘 대단히 좋은 책을 발견하였습니다.
THE DISCIPLING CHURCH: THE CHURCH THAT WILL STAND UNTIL JESUS COMES
https://www.wayoflife.org/publications/books/the-discipling-church.php
그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어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합시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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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가장 좋은 교회라 해도 그것은 은혜로 구원받았으나 여전히 옛사람을 지니고 있고, 유혹으로 가득한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죄인들의 심히 불완전한 몸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도자들을 바르게 임명하고, 개인의 구원과 교회 회원권의 중요성에 대해 특별 관심을 쏟으며, 제자 삼는 것과 훈육하는 일을 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강하게 되기를 원하는 교회가 그렇지 않은 교회보다 훨씬 낫다고 믿는다.
또한 나는 그리스도를 향한 첫 사랑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교회가 첫 사랑에 대한 감상만 가지고 있는 교회보다 훨씬 낫다고 믿는다.
끝으로 나는 여러 가지 실수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며 그리스도 안에서 점점 더 강하게 되려고 노력하는 교회가 정체 상태에서 현재에 만족하며 제자리걸음하는 교회보다 훨씬 낫다고 믿는다. --- 데이빗 클라우드
2017-08-05 11:06:22 | 관리자
the Book 뮤지컬 관련하여
팻머스란 선교단체에서
9월 한달간 11,000원 지원하여
15,000원 예약 가능하여 안내드립니다.
http://ticket.ipatmos.com/
위화면에서 '공연예약하기' 들어가셔서
아이디 : 이메일주소
비번 : 이메일비번 (아무번호 넣어도 된다고 써있는데, 저는 잘안되서 이메일 비번을 넣으니 넘어감)
* 회원가입하면 좋은데 주소>우편번호에서 안넘어감
좌석선택은 안되는데 예매하니 VIP(팻머스지정석)으로 나옵니다.
2017-08-04 06:27:55 | 조성재
안녕하세요?
2017년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해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뮤지컬 더북이 1년 내내 공연되고 있습니다.
https://musicalthebook.modoo.at/
며칠 전에 교회 밖의 한 자매님께서 뮤지컬을 보시고 후기를 보내 주셔서 소개합니다.
휴가 시즌에 가족끼리 혹은 성도들끼리 같이 관람하면 좋을 것 같아 소개합니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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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신롤라드들의 출현을 기대한다-뮤지컬 ‘더 북’ 관람 후기- 전O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공연인 뮤지컬 ‘더 북(The Book)’은 롤라드들과 가톨릭교회와의 진리 전쟁을 그리고 있다. ‘롤라드’(Lollard, ‘중얼거리며 암송하는 자’, ‘독버섯’이라는 뜻)는 종교기득권자들이 경멸의 의미로 부른 명칭이다. 롤라드들은 교회의 교리나 관행보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을 사랑하여 목숨 걸고 진리를 전파했으며, 가톨릭교회는 성경보다 종교적 관습과 전통을 더 중시하며 그들을 이단자로 낙인찍고 박멸하려 하였다. 종신선교사로 헌신한 배우들이 열연한 ‘더 북’은 롤라드의 이야기를 통해 평신도들이 진리를 분별할 필요성과 아울러 진리를 위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시사한다.
기독교는 “한 권의 책(The Book)의 종교”로 일컬어진다. 롤라드 운동이나 종교개혁의 중심에는 ‘그 책(The Book)’이 있다. ‘그 책’을 특권층의 전유물로 삼았던 종교기득권자들에 대항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만민에게 펼쳐 놓은 사건이 종교개혁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성경을 성직자들만 읽으라고 주셨겠는가.
1517년에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은 웬만한 사람은 알 만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 종교개혁 100년 전부터 이미 가톨릭교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오직 성경’을 외치며 종교개혁의 마중물 역할을 한 롤라드 운동은 그만큼 알려져 있지 않다.
중세암흑기로 불리던 당시에는 성경이 귀족과 식자층만 알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평민들은 성경에 접근할 수 없었는데 이는 교회의 권위를 교황에게만 두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가톨릭사제들은 교회의 제도와 교리와 관행을 따라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고, 교황은 십자군 원정비용과 베드로 성당의 건축기금을 충당하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해 구원을 돈으로 사게 만들었다. 또 고해성사로 사제에게 사죄나 처분권을 주어 사람이 예수님을 대신하게 만들고, 회개를 위선적이고 피상적으로 만들어 죄사함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성경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길과 예수의 피로 말미암는 죄사함의 길을 분명하게 제시하지만 사람들이 성경에 무지했기에 교회의 제도와 관행을 따르는 것이 구원의 길인 줄로만 알았다. 그 외에도 중세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타락한 종교지도자들 아래서 평신도들도 영적으로 타락해갈 때,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에 저항하는 평신도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의 제자들에 의해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접하고 진리에 눈을 뜬 자들이었다. 천 년의 전통을 깨고 영어로 성경이 완역되어 읽히면서 사람들은 변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영어로 번역된 성경의 확산을 막기 위해 번역 성경을 지닌 자들과 전하는 자들을 무참히 고문하거나 화형에 처했다. 번역 성경을 지니기만 해도 목숨을 위협받던 롤라드들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성경 66권의 이름을 취한 후 한 권씩 외우기 시작했다. 그들이 감찰사제의 눈을 피해 특정한 비밀 장소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한 권씩 암송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 적어 퍼뜨렸다. 성경을 지키고 전하기 위해 저마다 스스로 워킹바이블이 된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쉽게 성경을 다운받아 볼 수 있고, 가족의 전화번호조차 못 외우는 디지털 치매 환자들인 현대인들에게는 성경 한 권은커녕 한 장도 제대로 암기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롤라드들이 성경을 암송한 것은 들켜서 죽을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 성경을 전해야 했던 절박함 때문이었다. 대체 그 말씀을 전파하려는 열망이 얼마나 컸으면 한 사람이 성경 한 권을 통째로 다 외운단 말인가.
게다가 그들은 아는 것, 외운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목숨 걸고 전파하며 그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썼다. 롤라드들의 말씀 사랑의 정신과 삶의 태도는 신앙에서조차 쉽고 편함을 숭배하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경외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어떤 것의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보기 쉽다. 밥 한 그릇 안에도 그게 식탁에 밥이 되어 오르기까지는 우리를 먹이시기 위해 햇빛과 비를 주시고 곡물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씨 뿌려 가꾸고 수확하는 농부의 노고, 도정과 판매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고를 거쳐, 가족을 부양하려는 가장의 수고와 정성껏 밥을 짓는 주부의 수고가 들어갔다는 사실은 잘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이 성경이 이렇게 우리말로 번역되어 우리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은 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성경책을 아무런 방해나 박해 없이 자유롭게 마음 편히 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생명 걸고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도록 번역한 사람들과 생명 걸고 그 번역된 성경을 전파한 롤라드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 선배들이 물려준 최고의 유산은 번역된 성경이다. 지금은 휴대가 가능한 크기로 얇고 예쁘게 제본되고 인쇄되어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지만 불과 500년 전만 해도 성경을 사려면 1억 가까운 돈을 줘야 하고, 말 두 대가 이끄는 수레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성경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세기 성도가 아닌 것을 감사한다.
게다가 누구나 하나님을 자기 나라의 말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성서가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으며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는 한, 성서는 성직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 나라의 언어로 존재해야 한다.”라는 모토 아래 진행된 성경번역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구적이고 혁명적이었다.
종교개혁 역시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미 그 이전부터 불씨들이 있어왔고, 루터는 그 도화선이 되었을 뿐이다. 종교개혁은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닌, 평범하지만 결코 진리와 믿음에 타협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바로잡으시기 위해서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마르틴 루터 등의 사제나 신학자들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구두수선공, 타일제조공, 푸줏간 주인, 가정주부 등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사용하셨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는 목숨 걸고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 번역된 성경을 전하기 위해 애썼던 무수한 롤라드들의 물밑작업이 있었던 것이다.
극심한 카톨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롤라드는 학교를 세워 롤라드를 양성해 영국 전역에 보냈다. 그들은 개인 성경공부를 장려하고, 성령의 인도에 의지하며, 제도권이 내세우는 신조가 아닌 독자적인 믿음을 갖도록 격려했다. 또 모든 신자는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의 개념을 확고히 하고, 교황과 추기경들이 교회를 이룬다는 가톨릭의 정통 교리를 거부하고 본질적인 교회는 신자의 집합체라고 보았고, 설교와 성례 등을 공동으로 진행하였다. 회개와 제자도, 단순한 삶을 강조하고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며, 개인의 갱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재정립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롤라드의 지도자들은 이동하며 지속적으로 새로운 그룹을 만들고, 구성원들은 가정방문, 술집 전도, 시장 등 공공장소에서의 설교, 식탁대화, 성경방 초대 등을 시도하였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창안으로 롤라드의 성경보급운동은 더욱 확산된다. 이러한 롤라드들의 활동은 많은 평신도들에게 기독교 본질에 관해 눈을 열어주었으며 훗날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존 위클리프가 비판한 대로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이며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다. 예수님께서도 “기록되었으되...”, “성경이 뭐라고 말하느냐?”라고 하시면서 성경을 기준으로 가르치셨다. 누구든지 그 무엇이든지 말씀보다 더 우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가 교황이라도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말을 할 때는 믿어선 안 된다. 사실 예수님은 교황도 세우지 않았고, 종교제도도 만들지 않으셨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따를 대상은 교황도 교회도 총회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뿐이고 성경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교회에 다니면 구원 받는 줄로 안다. 봉사를 좀 하거나 교회의 제도나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 확신이 더하다. 그러나 성경을 펼쳐 읽지 않으면 그는 영적 소경이다. 뮤지컬 ‘더 북’에서도 롤라드의 수장 윌리엄의 가르침으로 성경의 진리에 눈을 뜬 아이린이 제화공인 아버지 토마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려고 애를 쓰지만 가톨릭 교리에 세뇌되어 온 아버지는 완강하게 거부하고, 아이린은 이단 감찰사제 베르나르에게 쫓기다가 끝내 붙잡혀 죽는다. 가톨릭교회의 제도에 순응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으면서 롤라드를 이단시하던 토마스는 딸을 잃고 나서야 딸의 유품인 번역성경을 읽으며 비로소 진리에 눈을 뜨게 된다.
또 다른 가톨릭 이단감찰 사제인 로버트는 롤라드들에게 자신과 다른 신앙의 생명력이 있음을 느끼고 주교의 명령을 거부하고 롤라드들을 변호한다. 그는 롤라드의 지도자인 윌리엄 사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중심에 성경이 있음을 알게 되고, 진정한 진리를 갈망하게 된다.
그런데 로마가톨릭 산하의 교회는 롤라드들이 전하고자 한 것이 진리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기득권이 더 중요했기에 그들을 기만하고 이단시하고 탄압한 것일까? 진리를 몰라서 탄압한 것일까? 주님은 진리의 말씀이 온 땅에 전파되기를 원하시는데 누구보다도 그 일에 힘써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진리를 전파하는 자들을 옥에 가두고 화형에 처했다면 그것은 주님이 아닌 자신을 섬긴 것이다. 로마와 결탁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죽인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믿음의 선진들이 죽음을 불사하며 성경을 번역해 전해주었고 그 안에 모든 좋은 약속이 다 들어있는데도 우리는 성경을 읽지 않아 중세시대 성도들처럼 무지하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국 자기를 섬기는 것이다.
이렇게 어렵게 전해진 성경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고 읽고 전하는 일을 해야 한다. 말씀은 2000년이 넘는 역사 가운데 거듭 검증되면서 오늘날까지 왔다. 150년 전에 유럽 교회가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부인하자 그 산산이 찢어진 말씀과 함께 교회가 다 망하고 말았다.
이 시대의 종교개혁은 누구를 대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가? 교회는 물론 개개인의 심령에도 부단히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종교개혁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항상 현재진행형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 세속화와 무신론화, 다원주의, 자유주의 신학 등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는 이 시대에 워킹 템플, 워킹 바이블이 되어 말씀을 살아내고 복음을 바르게 전해 줄 21세기의 신롤라드들을 주님은 애타게 찾고 계실 것이다. 이 종말의 때에 머지않아 우리가 성경을 갖고도 펴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성경을 펴서 읽을 수 있을 때 펼쳐 읽고 펼쳐 가르치고 전해야 한다.
성경은 만인의 것이며, 지금은 만인제사장의 시대다. 신학을 하지 않은 평신도에게도 주님은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고 그 깨달은바 말씀을 맡은 종이 되도록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신다. 그들이 바로 이 시대의 롤라드들이다. 600년 전 롤라드들이 100년 후의 종교개혁을 촉진했다면 21세기 신롤라드들은 마치 담쟁이덩굴처럼 이 땅을 복음으로 덮어 예수님의 재림을 촉진시킬 것이다.
뮤지컬 ‘더 북’을 보고 나오면서 나는 경외감과 두려움 속에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오늘날의 교회는 개혁이 필요하지 않은가,
당시의 타락한 가톨릭교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은가.나는 진리를 분별하는 힘이 있는가,
나는 얼마나 진리의 말씀에 눈 떴나,나는 성경의 가치를 얼마나 아나,
나는 그 말씀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나,나는 얼마나 말씀을 알고 얼마나 외우며 얼마나 전하고 싶어 하나,나는 말씀을 온 몸으로 살아내는 21세기의 신롤라드인가?
2017-08-03 09:12:21 | 관리자
안녕하세요?
오늘 아침에는 저와 제 아내와 함께해 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먼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교회에 대해 같은 생각과 철학/문화를 공유하며 같은 사역에 동참해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제 설교한 대로 “내가 감당해야 하리라”고 마음먹고 주님께 기도하며 올바른 교회로 세우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마음이 연약한 목사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제 우리 교회에 필요한 영적 선물 11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1. 지혜(의 말씀)
2. 영 분별
3. 주는 것
4. 권면하는 것
5. 섬기는 것
6. 긍휼을 베푸는 것
7. 다스리는 것
8. 믿음
9. 가르치는 것
10. 복음 선포자
11. 목사 겸 교사
성도님들이 각각 이런 선물을 주님께 구하시고 또 우리 교회에 이런 선물을 가진 좋은 분들이 넘쳐나서 바르게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픔을 겪는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1. 젊은 나이에 갑자기 아내를 잃은 형제
2. 메니에르 귀 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는 젊은 형제
3. 폐암으로 고생하는 젊은 형제
4. 노환으로 고생하는 어르신들
5. 갑작스런 사고로 고생하는 분들
6. 간이 좋지 않고 너무 심한 두통을 겪어 교회도 못 오는 분 등
당사자는 다음 말씀으로 위로받고 다른 분들은 간절한 기도로 고통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이것이 고통일지라도 내가 반드시 감당하여야 하리라.”(렘10:19)
어제 저녁에 중고등부 휴양회를 보려고 강화에 가서 3시간 함께하다 왔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복스러운지 모릅니다. 교사들의 헌신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이들과 교사들이 주님 안에서 마음껏 꿈과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교회를 세워야겠습니다. 교사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들 드립니다.
이번 토요일 오후에 있을 청장년부 휴양회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약 교회를 추구하려는 우리의 활동이 사람들의 호의를 입고 제대로 실천되도록 모두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에는 시편 51-100편을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news&write_id=2257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우리와 함께해 주실 줄 믿습니다.
샬롬
패스터
2017-07-31 09:53:25 | 관리자
겸손한 마음을 바탕으로 서로의 신뢰와 사랑이 전제되어야 권면이 가능하다는 것을 글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네요.
충고와 권면의 차이점을 알게되니 권면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위해선 꼭 필요한 것이지만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해야하고 철저히 상대를 위한 것이어야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2017-07-25 00:08:04 | 김상희
안녕하세요?
제 아내가 다음 글 <권면과 충고>을 읽고 제가 명심하면 좋겠다고 해서 읽어 보니 저와 리더들 그리고 우리 교회에 꼭 맞는 말이었습니다.
충고보다는 권면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전에 목회를 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목회를 하다 보니 목사와 성도의 두 측면을 모두 보게 됩니다. 목회를 하다 보니 가장 중요한 것이 교회의 화평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도 입장에서는 본인 자신의 불평과 어려움을 토로하는 일일지 몰라도 이것이 퍼져나가면 교회 전체적으로 보면 화평을 깨는 일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목사와 리더들의 권면 사역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교회에 워낙 개성이 강한 분들이 많다 보니 권면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여하튼 다음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성장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로마서 12장
3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너희 가운데 있는 각 사람에게 내가 말하노니 각 사람은 자기가 마땅히 생각할 것보다 더 높이 자기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나누어 주신대로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무를 가지고 있지는 아니하나니 5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각 사람이 서로 지체이니라. 6 그런즉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따라 우리가 다른 선물들을 가지고 있으니 대언이면 우리가 믿음의 분량대로 대언하고, 7 혹은 사역이면 우리가 우리의 사역하는 일로 섬기며,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섬기고, 8 권면하는 자는 권면하는 일로 섬기며, 주는 자는 단순함으로 그 일을 하고,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샬롬
패스터
--------------권면과 충고: 하재성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누구를 위한 권면인가'
권면은 충고와 다르다. 충고는 때로 내가 가진 진단과 처방으로 상대방을 바꾸어야 하겠다는 성급한 조언이다.
충고는 듣는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기도 하고, 때 이른 충고는 “자기가 뭘 안다고 충고야!” 하는 반감을 가져올 수도 있다.
목회 현장에서 지도자들의 “이건 내가 한 수 가르쳐 주어야…” 하는 충고의 태도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진정한 성경적 권면은 먼저 귀 기울여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헤아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충고는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음으로써 자신의 마음의 긴장이 풀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충고라는 의사소통의 형태에는 충고하는 사람 자신을 위한 면이 더 많다. 자신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면은 상대방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그에게 꼭 필요한 언어, 곧 상대방을 배려하는 언어로 마음을 터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권면이 상대방의 눈치를 보며 아부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랑으로 상대방을 바로 잡아 주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최소한 권면이란 것이 한 영혼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로 마음과 인격을 감동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메마른 잔소리나 성급한 충고는 변화를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그 사람을 쫓아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때 이른 충고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으려던 사람의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다. 결국 좋은 의도를 가지고서도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기 쉬운 것이 충고다.
목회 상담학에서 권면이라는 말은 흔히 권면적 상담(Nouthetic Counseling)으로 잘 알려진 상담학자 아담스(Jay Adams)의 이론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이 말은 훈계하다(admonish), 경고하다(warn), 교정하다(correct), 혹은 가르치다(instruct)의 의미를 가진다.
특히 아담스에게 있어서 권면이란 사람이나 문제를 피하지 않고 직면한다(confront)는 의미가 강하다.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교리와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딤후3:16-17) 역할을 가진 것처럼 아담스는 상담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여기에는 바울이 성도들을 자녀처럼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권면한 것(고전4:14)이나, 눈물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권면하던 모습(행20:31)도 포함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아담스의 권면적 상담이란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목회적 권면의 의미보다는 설교나 가르침에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그럴 경우 권면이 자칫 충고로 변질되기 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데는 익숙하여, 속 깊은 사정을 충분히 듣기 전에 이미 권면을 시작하고 있다면 그것은 흔한 충고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권면은 권면하는 사람의 편의나 감정해소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권면 받는 사람의 변화와 혜택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방에 대한 사려 깊은 이해와 사랑, 그리고 연약한 사람이 어떻게 나의 마음을 받아 더 바른 길에 설 수 있을까 하는 진지한 고민이 앞서야 한다.
다윗은 시편 41:1절에서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주}께서 고난의 때에 그를 건지시리로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에서 배려(권고)는 충고의 의미가 아니라 “상대방의 연약함을 배려하는 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권면하는 분들이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자질은 요란한 말재주나 힘든 것을 담대히 말하는 용기가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고 마음을 공감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부모가 청소년 자녀들을 권면할 때에도, 평소에 자녀의 필요에 전혀 관심 없는 부모가 성적만 가지고 다그칠 때, 그 아이는 더 이상 집에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목회적 권면은 권면자가 상대방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고, 그의 어려운 사정들을 먼저 공감하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사랑과 신뢰가 전제되지 않은 관계라면, 급한 일이 아닌 이상, 권면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존중과 사랑의 태도로 권면하는 것조차 소화하지 못하는 성도가 있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혹시 인격적 장애가 있는지, 그렇지 못한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인지 지도자들은 함께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특히 교회에 처음 나오거나 신앙을 처음 가진 분들에게는 권면과 도움이 꼭 필요하다. 교회에서 시험을 겪고 상처를 입은 분들을 위해서도 권면이 필요하다. 도덕적으로 그릇된 길을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역시 권면이 필요하다. 결국 권면이란 인격과 인격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도덕적 성격을 가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먼저 성숙한 사람, 혹은 먼저 지도자 된 사람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연약을 담당해야 하고, 더 큰 마음의 그릇으로 연약한 자들을 돌보는 사랑과 관심이 함께 가야 한다.
오늘 날 우리는 멘토링(mentoring) 혹은 코칭(coaching)이란 새로운 영역을 통해 여러 분야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전문적 교육과 인격적 권면을 함께 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들은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 새로운 이들을 세워주는 프로그램이다. 여러 교회에서도 잘 믿는 믿음의 선배들이 처음 믿는 사람들을 안내하고, 그들의 성장을 돕는 “양육사”들을 두고 있다. 교회의 신앙생활과 공동체 생활에서 권면과 모범은 먼저 믿는 사람들, 그리고 성숙한 지도자들의 의무이며 그들이 가진 지도력의 본질이다.
목회 상담자로서 필자는 때로 상담하고 권면하는 분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어려운 이야기를 정면으로 할 때가 있다. “이것은 당신의 잘못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물론 그 순간 상대방이 불편해 하는 것을 느낄 때도 있지만, 상담자로서 항상 먼저 실천하는 것은 충분한 청취와 공감이다. 그들의 마음을 먼저 이해하기에 상담자의 강한 표현과 해석에 대하여 내담자들이 “반감” 보다는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받아 들이는 것을 경험한다.
권면의 핵심은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이다. 그에 따른 진지한 청취와 공감으로 그의 입장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기술이라면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권면의 방법, 언어의 선택은 바로 그 진실한 관심과 사랑에서 흘러 나온다. 권면은 지도자들에 의한 것이지만, 권면의 목적은 지도자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권면은 오직 그것을 받는 영혼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2017-07-21 09:32:23 | 관리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그분을 위해 일하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무언가를 하는 것이 언제나 더 쉽습니다. 우리는 교회나 가정에서 당혹스러울 정도로 바쁜 행사를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역자는 너무나 적고 그분을 위해 일하는 사람만 많습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격의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착각에 빠지는 분들이 심히 많습니다. 무언가를 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면서....
대표적인 사례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주님을 쫓아다니면서 열심히 재정 관리하고 여러 일을 하였으나 구원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성장을 감독해야 하는 목사로서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인격과 믿음의 성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경건 서적을 읽을 줄도 모르고) 그저 일로 때우려는 분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일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하는 것만큼 성경 지식의 증대, 언행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경건 서적을 읽고 자기를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책 읽기와 교제를 등한히 하면서 일만 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으면 주변 분들이 권면해 주셔야 합니다.
“일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먼저라고.”
샬롬
패스터
(*)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을 읽으며
2017-07-18 09:32:00 | 관리자
온 세상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알 수있는 일이지만,
관용이 선인듯 착각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함께 동조하고 있으니....
2017-07-17 15:43:42 | 이수영
안녕하세요?
오늘(7월 15일) 동성애 축제가 서울 광장에서 열리고 있습니다.동성애 문제는 매해 늘상 일어나는 일로 치부할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재림의 때가 노아와 롯의 때와 같이 동성애가 창궐하는 때라고 우리 주님은 명확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와 우리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 성도들은 ‘동성애자는 사랑하되 동성애는 죄’라고 명확히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퀴어 축제에는 진보 교회들이 동성애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 참으로 두렵습니다.
http://media.daum.net/photo-viewer?cid=357916#20170715114443442
이러는 가운데 미래한국에 아주 의미 있는 기사가 실렸기에 같이 공유하고자 합니다.
동성애가 창궐하면 믿는 자뿐 아니라 믿지 않는 자도 같이 멸망합니다.이 기사는 동성애의 실체와 실태를 아주 명확히 보여 줍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간절히 구합니다.
샬롬
패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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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한국 사회에 어둠을 드리우는 굿판
‘소수자’로 위장하며 억지 권리 요구 - 퀴어문화축제
염안섭 전문의·수동연세요양병원장(미래한국2017.07.05.)
필자는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말기 암 환우를 진료하던 호스피스 전문의였다. 그러던 중 암 환우들을 위한 요양병원을 개원했는데, 어느 날 갈 곳 없는 에이즈 환자 한 사람의 사연을 듣게 되었다.
이 사람을 치료하면서 연이어 갈 곳 없는 에이즈 환우들이 오게 되어 무려 7만 번이 넘는 에이즈 진료를 하게 되었다. 의료 현장에서 본 에이즈 환자들은 거의 다 동성애로 에이즈에 감염됐고 그 말로는 실로 끔찍했다. 에이즈 바이러스는 면역력만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다.
에이즈 바이러스의 무서운 점은 뇌세포를 갉아먹는다는 것이다. 뇌세포를 에이즈 바이러스에게 갉아 먹히면 반신불수, 전신 마비, 식물인간 등이 된다. A씨의 예를 들면,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멀쩡하게 잘생긴 젊은 청년인데, 동성애로 인해 에이즈에 감염되어 지금은 식물인간이 되었다.
목에 구멍을 뚫고 가래를 뽑으면서 가족도 몰라본 채로 기저귀를 차고 남은 인생은 살아야 했다. 그 처참한 현장에서 “동성애만 안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라는 안타까움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지금 이 시대의 언론이나 유력 인사들이 동성애를 미화하는 것을 볼 때는 그 달콤한 말의 미혹에 빠져 호기심에 동성애를 접해 처참하게 죽어갈 이름 모를 젊은 청년이 보이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진다.
왜 필자가 ‘동성애의 실체를 알릴 수밖에 없는가’ 라는 질문의 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알려야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에이즈환자는 실제로 어떤 모습일까? 미국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에이즈 장기요양시설에 입원하는 남성 동성애자의 평균연령은 41세에 불과하며 44%가 정신질환, 48%가 심각한 신경계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중 57%는 마약중독자였고 이들은 입소 전 11개의 약물을 복용할 정도로 많은 합병증을 갖고 있었다. 필자의 진료 경험도 이와 비슷한데, 우리나라는 마약이 보편화되지 않아 마약 남용 대신에 알콜 중독이 에이즈환자들에게 많이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에이즈와 동성애의 연관성은 어떤 것일까?
박재형 가천대 길병원 교수는“남성 동성애자가 에이즈에 걸릴 확률은 남성 이성애자에 비해 약 750배 높음을 알 수 있다”며 에이즈 확산의 주요 원인으로 남성간의 성관계를 지적했다.
미국질병관리본부는 에이즈와 남성간의 항문 성관계의 밀접한 연관성에 대해 홈페이지에 명확히 게시해 미국 국민을 계몽하고 있는데, 2013년 13-19세 신규에이즈감염자의 92.8%가 남성간의 성 접촉으로 인한 것이고 1.4%는 남성간의 성관계와 마약주사를 같이 한 경우였다.
▲ 의료현장에서 본 에이즈 환자들은 거의 다 동성애로 에이즈에 감염되었고 그 말로는 실로 끔찍했다. 에이즈 바이로스는 면역력 저하 뿐 아니아 뇌 세포를 갉아먹는다. 그렇게 되면 반신불수, 전신마비, 식물인간 등이 된다.
20~24세 에이즈 신규 감염자의 91.7%도 남성간의 성 접촉 때문이었고 3.0%는 남성간 성 접촉을 하면서 마약주사를 같이 한 경우였다. 두 개의 수치를 더하면 에이즈감염자 중 무려 94% 이상이 남성간 성행위 때문에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질병관리본부의 홈페이지에는 2007-2010년 에이즈 감염자 중 대다수가 동성애자라고 밝히고 ‘대부분의 게이와 양성애자 남자들은 항문 성교를 통해 에이즈에 감염된다. 항문 성교는 에이즈에 걸리거나 전염시키는 가장 위험한 행동’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에이즈 감염에 있어서 혈액제제에 의한 감염은 1995년, 수혈로 인한 감염은 2006년 이후 보고사례가 전혀 없다. 2013년 1114명의 에이즈 신규 발생이 신고되었는데, 남자가 1016명, 여자가 98명으로 10.4:1로 압도적으로 남성이 많았다. 그리고 감염 경로에 대해 확인된 것은 100% 성 접촉이었으며, 현재 대한민국의 에이즈는 부적절한 방식의 성관계로 옮는 성병이다.
그 중에서도 에이즈 감염의 진원지는 남성간의 항문 성관계로 성적 쾌락을 얻는 남성동성애자이다.(만일 남성과 여성간의 정상적인 성관계로 에이즈에 감염되는 예가 많을수록 에이즈 남녀성비는 1:1에 가까워진다) 사실이 이러한데, 필자는 대한민국의 현재 소위 ‘성소수자 인권’이라는 단어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 심히 안타깝고, 동성애자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성관계를 도덕적으로 인정하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동성애자들을 위하는 길이 아니다.
그들이 걸어가는 죽음의 길을 ‘평안하다, 평안하다’며 거짓말을 하는 이는 거짓선지자이다. 동성애의 행위들이 인권임을 표명하는 동성결혼법과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어 버리면 진실로 그들의 사람답게 살 권리인‘인권’을 위해 행동할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린다.
필자는 동성애를 탈출하고 싶어 하는 많은 청년들의 상담을 요청받았는데, 누구나 2년 정도 노력하면 동성애를 탈출할 수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사례에서는 동성애를 탈출하는 것이 비만을 탈출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고 고백한 예도 있다.
동성애자로 사는 것보다 동성애를 끊는 것이 훨씬 쉽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비만을 탈출하는 것보다 동성애를 탈출하는 것이 훨씬 쉽다. 그런데 동성애자들을 위시한 성소수자들은 그들의 행위를 유지 강화할 목적으로 그들만의 성도착축제인 퀴어축제를 서울광장에서 올해도 여김 없이 연다고 한다.
7월 15일로 예정된 이 축제에는 온갖 성도착증 환자들이 모여 자신들의 성도착증세를 인권이라고 우길 것이고 아무 죄 없는 서울 시민들은 그 날 공개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낯 뜨거운 모습들에 눈살을 찌푸리게 될 것이다.
말 못하는 말(馬)을 괴롭히는 성소수자들
이 참에 독자들이 성소수자의 세계를 엿볼 수 있도록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이들의 세계를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은 동물과 사람이 성관계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명 수간금지법이 있는데, 이 배경이 성소수자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05년 시애틀 인근의 한 종합병원 응급실에 신원을 밝히기를 꺼려한 2명의 남성이 자기 친구라면서 한 남성을 데리고 왔다.
환자는 항문 손상으로 인한 직장 파열과 장 천공으로 생명이 위독해 의료진들이 급히 응급수술을 했으나 생명을 구하지 못했다. 경찰이 수사한 결과 사망한 이는 워싱턴주의 부촌 지역인 기그 하버에 거주하는 비행기 회사인 보잉사의 중역인 케네스 피니언이라는 남성이었다.
이 세 명의 남성은 바로 숫말과의 수간을 즐기는 동호회의 친구지간이었던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이 남성들은 동성애자들로 더 이상 남성끼리 성관계하는 것에 만족을 못느끼고 좀 더 자극적인 방법을 찾다가 자신의 항문을 숫말에게 제공하는 일명 수간동성애자들이었다.
그간 이런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가 케네스 피니언의 사망을 계기로 남성동성애자들이 자신의 항문을 통해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가질 뿐 아니라 숫컷말, 개 등과 항문성교를 벌인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사건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날도 이 수간동성애 삼총사는 여느 때처럼 남의 농장에 잠입해 그들이 가장 아끼던 빅 딕이라는 별명의 숫말과 즐겼는데, 그간 오랫동안 남의 농장을 야간에 잠입해서 이 짓을 안 들키고 행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 날은 다른 날과는 달랐다. 숫말과 성행위 초반 케네스는 평소와는 다른 감각, 즉 구토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저녁 먹은 게 체한 것 같다는 농담을 주고 받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케네스는 엄청난 기세로 구토를 하며 토사물을 쏟아냈고 토사물이 피빛을 띠고 있는 것을 보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말의 성기를 뺐는데 그제서야 케네스의 항문에서도 붉은 혈액이 줄줄 흘러나왔고 결국 케네스 피니언은 4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결국 워싱턴 주의회는 급하게 수간 금지법을 제정하게 되고, 이로써 동물과의 성적 접촉을 처벌하게 되었다.
실제로 이 법이 발효된 이후로 워싱턴 주에서 한 남성이 자기 집에서 개랑 섹스를 하다가 아내에게 휴대폰 사진으로 그 현장을 찍혀서 기소되었다.
한편 이때 전 미국 언론의 유명세를 탄 수간동성애 삼총사 중 한명(케네스 피니언을 응급실로 데려온 두 남성 중 한 명)은 친구의 죽음을 통해 개과천선을 한 것이 아니라 몇 년 후 테네시 주에서 또 숫말과 수간을 시도하다 체포되었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겪었지만 고치지 못하는 이유는 이것이 바로 성중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이 이 사건을 통해 수간금지법을 만든 이유가 또 특이하다.
대니얼 새터버그 차장검사는 수간 범죄자들이 아동들을 성폭행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한 조사 결과 밝혀졌다며 수간 금지법안이 아동 성범죄 예방에도 한 몫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이 사건을 들여다보면 남성동성애자가 항문 성교의 쾌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심지어 숫말과 성관계를 했다가 사망해 수간금지법이 만들어졌는데 수간금지법을 만든 이유가 수간을 하는 사람들이 아동들을 성폭행하는 소아성애자들이 많아서라는 것이다.
성소수자의 세계는 이처럼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왜냐하면 나쁜 쾌락의 추구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피니언의 기묘한 이야기는 2007년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되었고, 856개의 후보 중 16개의 수상작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케네스 피니언은 사망하기 이전에 워싱턴주 기그 하버에 있는 키 페닌술라 고속도로(Key Peninsula Highway)에 새 집과 말들을 들여놓을 마구간을 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트랜스젠더라는 말을 탄생시킨 악마적 실험
이런 엽기적인 사건 말고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는 트랜스젠더라는 말을 태동시킨 성소수자인권옹호 의학자의 악마적 실험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트랜스젠더나 젠더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말은 성소수자의 소위 ‘인권’을 상징하는 단어 중 하나이다.
성소수자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해 정상 어린아이들에게 성폭행에 가까운 실험을 서슴지 않았던 성소수자인권운동가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명으로 대표적인 성소수자인권운동가이자 의학자였던 존 머니라는 사람이 있다.(1921~2006)
이 사람은 트랜스젠더의 젠더(Gender) 라는 용어를 만든 성과학자이다. 존스홉킨스병원의 심리학자이자 성과학자인 존 머니가 성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한 연구는 데이비드 라이머라는 1965년 8월 22일 출생한 남자아이에 관한 것이었다.
이 아이는 1966년 포경수술을 하다가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당했는데 의료사고로 생식기가 잘렸다. 이 일이 언론에 알려지자 존 머니가 이 아이의 부모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아이의 부모에게 성전환수술을 설득해 데이비드 라이머는 존 머니에 의해 설득당한 부모의 동의만으로 고환을 제거당하고 트랜스젠더가 된다.
그리고 데이비드라는 이름마저도 개명당해 브랜다라는 여자 이름을 새로 부여받고 브랜다 라이머라는 여자아이가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전혀 아이의 의사는 존중되지 않았고 존 머니의 의중대로 아이가 끌려다니게 되었다.
수술 이후에도 존 머니는 이 아이를 대상으로 많은 연구를 하고 성소수자인권을 위한 발표를 하게 되며, 존 머니가 사용한 ‘젠더’라는 말은 좋은 의미의 단어로 전 세계로 확산된다.
그러다가 이 아이가 14살이 되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이 아이는 자신은 여자로 살기가 싫고 남자로 살고 싶으며 브랜다가 아닌 데이비드로 살고 싶다고 하여 다시 남성이 되는 어려운 수술을 받게 된다.
그리고 존 머니로 인해 자신의 삶이 불행했다며 존 머니가 자신에게 행한 의학적 실험은 잘못된 것이니 절대 행해져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에 밝혀지기를 존 머니는 심지어 여자가 된 이 작은 아이에게 진정한 여성이 되려면 남자와 성관계를 할 줄 알아야 한다며 이 꼬마에게 성관계 실습을 시켰는데, 놀랍게도 이 아이의 형인 브라이언에게 동생에게 성행위를 가하라고 강요하고, 이 두 형제에게 포르노를 보여주며 따라하라고 강요해 아직 자기방어능력이 없는 이 작은 형제는 그것이 잘못된 일인지도 모르고 존 머니가 시키는 대로 성관계 실습을 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2000년에 데이비드 라이머와 브라이언이 폭로하게 되어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때 존 머니는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고 어린 시절 성적 연습이 건강한 트랜스젠더 정체성에 중요하기에 그렇게 했다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쳤다.
그 뿐 아니라 존 머니는 ‘애정적 만남의 소아성애자의 소아와의 성행위’는 ‘사랑’이지 ‘섹스’가 아니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특이하게도 2004년에 개봉한 인간과 동물과의 섹스를 주제로 한 영화인 ‘애니멀패션’(Animal Passions)에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 후 이 두 아이는 형인 브라이언 라이머는 존 머니가 강요한 악마적 실험에 의한 정신적 충격 속에 우울증에 빠져 항우울제 과다복용으로 2002년 7월 1일 사망하고 2004년 5월 5일 데이비드 라이머는 존 머니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해 38세의 나이에 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하게 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라이머 형제의 부모는 아들 둘을 불행하게 잃은 후 존 머니 때문에 자식이 둘 다 죽었다며 한탄을 했지만 이미 죽은 자식들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필자는 젠더나 트랜스젠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말을 만든 성소수자인권운동의 대부 존 머니가 떠오르고 그가 잔인한 실험을 통해 만든 단어인 젠더, 그리고 그 말을 만드는 실험 대상으로 쓰인 불행한 두 아이에 대해 떠오른다.
그런데 얼마 전 필자는 씁쓸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모 부처의 장관으로 지명된 분이 “경제개혁에 젠더(gender)가 폭 넓게 반영되도록 하겠다”라며 장관이 될 이로써 젠더이데올로기를 대한민국에 본격적으로 확산시킬 포부를 밝히는 것이었다. 죽은 자, 특히 약한 자가 죽으면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지만 젠더라는 말을 만든 악마적 실험의 희생양이었던 데이비드 라이머 형제가 들었다면 아마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타락한 소수의 문화에 짓눌리는 한국
‘한국퀴어문화축제’(Korea Queer Culture Festival, KQCF)는 2000년 이래 매년 6월 경 국내에서 열리는 성소수자들의 축제이다. 퀴어문화축제는 크게 퀴어퍼레이드, 퀴어영화제, 퀴어파티 등으로 이뤄지며 토론회, 전시회, 사진전 등이 함께 열리기도 한다.
퀴어퍼레이드 혹은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2000년 대학로에서 처음 열렸다. 이후 홍익대 인근과 이태원 등지에서 열리다가 15회 퀴어문화축제는 2014년 6월 7일 연세로(신촌 차 없는 거리)에서 진행했다. 15회 축제는 세계적인 기업인 구글(Google)이 후원하고 미국, 프랑스, 독일 대사관도 함께 참여한 역대 가장 큰 규모의 행사였다.
서대문구청은 “세월호 참사로 추도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는데다 현재 사회 분위기에도 적합하지 않다”며 연세로의 사용을 불허했다. 신촌지역주민들과 학생들도 퀴어축제 개최에 항의했다. 그러나 퀴어문화제 주최 측은 “사랑이 혐오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행사를 강행했다.
당일 오후 신촌 연세로는 동성애를 지지하는 각종 문구들과 플래카드, 남장을 한 여자, 여장을 한 남자, 술병을 들고 돌아다니는 만취한 외국인 LGBT들과 반나체로 음란한 퍼포먼스를 하는 동성애자들로 가득 찼다. 동성애축제 주최 측이 거리에 설치한 부스에서는 무료 AIDS 검사, 성병검사, 콘돔 판매 등이 이뤄졌다.
16회 서울동성애 축제는 2015년 6월 28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개최되었다. 특히 이때는 전국을 강타한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로 인해 각종 행사들이 감염의 우려 때문에 줄줄이 취소되었던 때였다.
그리고 많은 국민들이 메르스 퇴치에 국가적 힘을 모으기 위해 애쓰던 때였는데 성소수자들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서울광장에 모여 성기 모양의 쿠키와 상품을 팔고 동성애자들의 노출 수위도 더 심해지는 등 축제는 지난해보다 더 선정적이고 퇴폐적이었다.
6월 26일 미국 연방법원에서 동성혼인 합법화 판결을 내린 뒤였기에 미국 대사관까지 나서서 동성애 축제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그렇다면 올해는 과연 어떠할 것인가?
성소수자들은 ‘소수자‘라는 가면을 쓰고 이 사회를 향해 오직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특혜를 달라고 떼를 쓸 것이다. 그러나 수가 많고 적음이 특혜를 줄 사유가 아니라, 그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와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특별한 혜택을 줄 만한 것인가를 검토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다친 보훈대상자는 그분들이 추구했던 가치와 희생이 특별한 혜택과 보호를 통해 대한민국의 중심 사상이 될 만한 값어치가 있기에 이 사회가 숭고하게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성소수자는 이 사회를 위해 숭고한 희생을 치른 집단이 전혀 아니다. 단지 그들만의 기묘한 성생활을 적극적으로 즐기고 있는 집단일 뿐이다. 그런데 이들은 단지 그들의 수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이 사회에 요구하고 있다.
단순히 소수냐 다수냐 라는 숫자의 개념이 논의의 중심이 된다면 예를 들어 성소수자 중 어린아이들을 성의 대상으로 삼는 소아성애자들은 당연히 소수이므로 이들의 선택의 자유를 특별히 보호하고 이들의 성적 만족을 보호하기 위해 성애의 대상들인 어린아이들을 확보하기 위해 다수자인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는 논리가 형성된다. 올해 벌어질 퀴어문화 축제가 이런 성소수자의 논리를 강화시킬 장이 될 것이다.
출처: <저작권자 © 미래한국,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626
2017-07-15 13:57:27 | 관리자
이 책 역시 오래 전에 나왔습니다.
http://lifebook.co.kr/final/bookjumun.asp?gs_product=aa01070055572
2017-06-30 14:18:29 | 관리자
이 책은 이미 두란노에서 번역해 냈습니다.
http://lifebook.co.kr/final/bookjumun.asp?gs_product=aa01070106810
2017-06-30 14:14:49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즘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님의 여러 글을 읽다가 그분의 책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마존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13년 전에 출간한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제목은 모든 성도들이 늘 겪는 일 자체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을 때: 어떻게 기쁨을 쟁취할 것인가?”(When I don’t desire God: How to fight for Joy)
이 책에서 파이퍼 목사님은 성도들이 낙심한 가운데 어떻게 주님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책 역시 제게는 꿀송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살펴보고 현재 오전에 진행되고 있는 “크리스천 기초 시리즈”를 조금 더 해서 마치면 이 책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좋은 교사를 우리 모두에게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파이퍼 목사님이 요약해 놓았으니 저의 생각을 더해 기쁨을 쟁취하는 법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샬롬
패스터
https://www.amazon.com/When-Dont-Desire-God-Fight-ebook/dp/B00IYOXEW0/ref=sr_1_8?ie=UTF8&qid=1498799400&sr=8-8&keywords=john+piper+books#reader_B00IYOXEW0
2017-06-30 14:11:35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즘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님의 여러 글을 읽다가 그분의 책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마존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2017년 4월 30일에 나온 시간이 곧바로 눈에 띄었습니다.
제목이 기가 막히게 좋습니다.
"성경을 초자연적으로 읽기: 하나님의 영광을 눈으로 보고 맛보기"(Reading the Bible Supernaturally: Seeing and Savoring the Glory of God in Scripture)
안을 보니 성경을 맛있게 읽을 수 있는 것들을 요약해 놓았습니다.
책을 보면 금세 그 내용이 어떤지 이해할 수 있는 제게는 꿀송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살펴보고 현재 오후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인도 바로 알기"를 조금 더 해서 마치면 이 책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교사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파이퍼 목사님이 요약해 놓았으니 저의 통찰력을 더해 맛있게 성경 읽는 법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샬롬
패스터
https://www.amazon.com/Reading-Bible-Supernaturally-Savoring-Scripture/dp/143355349X/ref=tmm_hrd_swatch_0?_encoding=UTF8&qid=1498799400&sr=8-2
2017-06-30 13:57:31 | 관리자
모든것을 정치적 이념의 소재로 삼고 있는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서...특별히 교육부분에 까지 정치권의 이념대립으로 갈등하는 현실을 보면서..성도로서 그리고 교육학을 공부하는 학자로서 많은 부분이 염려스럽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핏값으로 사주신 어르신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부분 만큼만이라도 은혜를 기억하는 한목소리를 내면 좋겠습니다.
2017-06-28 00:31:52 | 오광일
민족과 국가의 역사를 바로 알고
그 역사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지금 처해 있는 문제도, 다가올 미래도 하나님께 바르게 간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국가와 민족의 역사뿐만 아니라
개인과 각 가정의 역사를 깊이 생각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할 때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주님안에서 바르게 발전해 나갈 수 있겠지요~
이집트를 탈출하고 가나안을 정복하기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수시로 망각한 이스라엘에 대한 기록은
우리의 배움을 위함임을...
2017-06-27 16:06:14 | 정진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