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역사는 분명하게 국가가 좌로 가서 사회주의를 하면 반드시 망함을 보여 줍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장이 일하도록 자연히 두면 국민은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개입해서 시장을 주무르면 국민과 기업은 속박에 매이게 되고 이득을 창출하지 못하며 결국 그 사회는 망하게 됩니다. 정치, 언론, 문화 등은 좌익의 선동과 속임수로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는 절대로 못 속입니다. 특히 수출 주도형 경제를 가진 우리나라 같은 경우 더더욱 속일 수 없습니다. 다른 나라들과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대다수 국민들이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고용은 안 되고 매출은 떨어지며 이득은 줄어들고 계획 경제를 해야 하므로 세금은 늘어나니 장기적으로 어떻게 잘 될 수 있을까요? <최저임금 추가인상 움직임에 350만 소상공인 "불복종 투쟁 나서겠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11/2018071100174.html?utm_source=naver&utm_medium=original&utm_campaign=biz 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7750 이것이 사회주의의 병폐이며 문제임을 정상적 사고를 하는 분들이 지금까지 누누이 지적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고치지 않다가 지금 문제가 크게 터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긍휼만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나라가 살려면 반드시 자유 민주주의/자유 시장 경제 체제로 가야 합니다. 그 안에서 싸워야지 좌의 사회주의로 가면 안 됩니다. 다음은 한 청년의 좌파 탈출기입니다. 이분은 기독교인 것 같고 이제야 기독교의 핵심을 잘 이해한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부지런히 일하며 애국하고 믿음 생활 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광우병 선동에 속던 나, 색안경 벗었다 안녕하세요 전라북도 전주에 사는 20대 청년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조금 유별나게 역사, 사회, 정치적 거대담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국사과목만은 항상 만점을 맞았고 뉴스, 신문은 매일 꼬박꼬박 보며 저의 생각을 정리하고 가치관을 정립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라도 특성상 좌파 이념이 자연스럽게 유입되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사회(지역) 분위기는 물론 학교에서 조차 우파는 기득권, 요즘말로 적폐세력이라 가르치며 논술 공부한다는 미명 하에 좌파언론의 사설만을 제시하고 근현대사 시간에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도 서슴없이 틀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투철한 좌파의 전사로 양육되었고 2006년 지방선거에 좌파의 참패와 17대 대선 당시 정동영 후보의 패배로 인해 우파에 대한 분노가 싹트고 있었습니다. 때는 2008년 광우병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학교는 광우병 찌라시가 돌아다녔고 저 역시 우파가 틀렸다는 것이 입증된 것 마냥 희열감에 촛불시위에 나가 '이명박 아웃'을 외치고 다녔습니다. 주변사람들에게도 광우병 사태에 대해 선동을 하고 다녔고 동생에게 “이명박이 광우병 걸린 소를 수입해서 우리 다 죽이려 한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때 동생은 저에게 “형. 정신 차리고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봐 이명박이 사이코패스야? 전 국민을 광우병으로 죽이게? 형은 그냥 이명박이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했고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진실을 쫓아왔던 게 아니었습니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나의 가치관, 이데올로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상대의 단점을 파헤치기 위해 공부 해왔고 행동했으며 이를 통해 나는 정의롭다 진실을 추구한다고 위안을 삼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제 동생은 정치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항상 비판적 사고를 할 줄 알며 상식을 추구하는 개인주의 성향인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내가 생각해 왔던 진리, 정의가 틀릴 수도 있음을 깨닫고 모든 면을 새롭게 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가치관을 정당화 하는 수단의 공부가 아닌 진실추구를 위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모든 것을 부정해야 했기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초기에는 외교, 안보는 우파-민생은 좌파라는 저 나름의 기준을 세우고 있을 무렵 사회적으로 무상급식 논쟁이 떠오르고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과 싸울 때의 일입니다. 저는 저소득층으로 무상급식을 받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전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못했고 무상급식은 복지를 확대해 복지 사각지대를 챙기는 모습이 아니라 중산층, 상류층이 저소득층에게 가는 복지에 자기들도 한발 들여놓겠다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민주당은 무상급식이 좋다고 선전하며 투표 독려 운동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는데 항상 투표참여, 선거연령 하향을 주장하는 민주당이 자기들 불리할 때는 투표 거부 운동을 하는 모습에 신물이 나고 민생 또한 우파가 잘하며 좌파들은 이용할 뿐이구나 라고 느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저는 완전히 좌파에서 탈출하여 우파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진실이 무엇인지 무엇이 맞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좌파는 위선적이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으로 ‘인간 개개인은 신 앞에 선 단독자’로써 개인주의와 자기책임, 자유주의 사상을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한없이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인간의 힘(생각)으로는 절대 이상향을 만들 수 없고 인간이 임의(의도)적으로 세팅하고 계산(계획)한 이상향은 위험할 수 있음을 현재 포스트모더니즘, pc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진리를 사수하는 모습에 우파와 기독교적 가치관은 닮은 점이 많음을 알았고 공부를 할수록 저의 원래 내면 깊은 가치관은 우파에 적합했구나를 느낍니다. 하지만 우파로 전향한 현실은 냉혹하고 고독했습니다. 예전에는 주변사람들과 정치, 사회적 이슈를 이야기하면서 서로 단합하고 하나가 됨을 느꼈지만 이젠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서로 단절되고 멀어져만 갔습니다. 전라도에서 그것도 청년이 우파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자체로 저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고 제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해도 조금이라도 수가 틀어지면 들으려 하지를 않아 조금씩 정치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러 사례가 있지만 최근에 문재인의 거짓평화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 하면서 “북핵이 폐기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핵, 북한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이 김정은과 악수하고 평양냉면 먹으면 평화가 오는 거야?”라고 했는데 돌아오는 답변은 “전 국민이 평화를 염원하고 바라는 상황에서 찬물을 끼 얹으려는 이유가 뭐야? 보수정권은 못한 일을 문재인 대통령은 해냈으니까? 너 소시오패스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소시오패스가 무슨 말인지는 모릅니다. 소시오패스를 반사회적 인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사회성이 결여됬다는 말인 것 같은데 좌파들은 공감능력만 있지 이성과 논리는 없고 전부 저런 식으로 생각하고 개인이 부재 하는가보다 라고 웃으며 넘겼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생각을 변화시킬까를 고민하던 중 저는 조금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가게 되었고 나이가 많아 걱정을 하였지만 나잇값 때문이라도 나름 성실히 군생활을 하였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후임들에겐 그냥 선임이 아닌 나이도 많고 의지할만한 선임으로 간부들에겐 성실하고 믿을만한 분대장으로 인지(?)되었고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귀 기울이고 행동의 변화도 보였습니다. 저는 군종병으로 교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다른 때(이전) 보다 그리고 다른 중대에 비해 교회로 많이 전도되고 후임들이 잘 따랐습니다. 군대에서 여러 가지 많은 것을 배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변하면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 주는구나 나를 좀 더 발전시키고 성실히 살아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전역 후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기에 우선 사회에서 평가하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헬스도 하면서 나름 몸과 마음 정신을 가꾸고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제 자신에게 자신감이 생기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정치적 이야기를 할 때 마음속을 후벼 파는 듯한 공격적인 말을 주로 했지만 이젠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서 어느 정도 인정도 해주고 반박을 하니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도 보이고 그냥 평범한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씩 그 사이에 좌파의 잘못된 점을 삽입시키면서 이야기하니 거부반응도 없는 것 같습니다. 몇 명은 우파적 마인드로 변화시키는데 성공도 했습니다. 제가 좌파였을 때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항상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서 세상을 바로 볼 수 없었고 또한 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항상 바깥에 탓을 돌리며 발전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좌파에서 탈출하여 우파가 된 지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고 나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시키니 내 삶이 바뀌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책임의식이 생기고 나 자신에게도 자부심, 자신감이 생기며 좌파였을 때는 나의 사상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공부해 왔지만 색안경을 쓰지 않고 공부하면 할수록 우파사상이 진리에 가까움을 느낍니다. 아직 좌파에서 탈출하지 못한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좌파의 사고방식만이 진리라 생각해왔고 우파는 무조건 악으로 여겨왔기에 변화하는데 힘이 들것입니다. 요즘같이 좌파 광풍시대에 주류에 편승함에서 오는 평온함을 벗어나기 싫을 수도 있겠네요. 내 현실이 못마땅하다면 나 자신을 변화시켜 보세요. 사회 탓 남 탓만 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세상과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처음에 시작 할 때는 좌파가 무조건 맞고 우파는 틀리다는 생각을 버리고 왜 우파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에서 고민해보면 우파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할 것이고 어디를 지지하건 적어도 무조건적 맹목적인 지지는 하지 않을 테니 그 이후에 좌파, 우파를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전명수(27·대학생/최우수상 수상자) veritas9271@naver.com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7641)
2018-07-12 15:21:08 | 관리자
여러 맘은 다 접어두고서라도 눈물이 나네요. 대한민국에서 이런 청년들과 함께 우리 아이들도 같이 어른이 되어가면서..열심히 살다 올거라는 생각에 기쁩니다. 큰 감동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2018-07-10 14:17:33 | 목영주
용기 있는 청년의 좌파 탈출기 01 10대의 내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바로 ‘좌파에 찌든 삶’ 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좌파였다. 그것도 그냥 일반적인 좌파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책을 옆에 끼고, <공산당 선언>을 입에 읊고 다녔던 ‘극좌’. 공부 대신 나는 내 10대 시절을 거의 과거 운동권과 비슷한 지하써클 모임만을 쫓아다니며 지냈다. 그때의 내게 자본주의와 대한민국은 만악(萬惡)의 근원이었다. 바로 내가 참석했던 그 모임의 선배들이, 그리고 전교조 교사들이 내게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이 미국에 빌붙어 세운 정당성 없는 국가라고. 자본주의는 1%가 나머지 99%를 착취해먹는 악질적인 체제라고. 그래서 나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이 체제를 뒤집어 엎고 사회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이해해서 좌파 사상을 추종했던 것이 아니었다. 나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마르크스의 이름을 소리높여 외쳤던 내 주변 친구들 중 정작 마르크스를 읽어본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사상을 정확히 이해조차 못한 우리들이, 도대체 왜 그의 사상을 그토록 열렬히 추종했던 것일까? 정답은 ‘그것이 멋있으니까’ 다. 일반 사람들도 종종 그렇지만, 아직 철이 덜든 10대, 20대들에게는 무언가 기존의 것들을 삐딱하게 보고 그것을 부정해야만 멋있다는 왜곡된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가 좋은 체제라고?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라고? 설령 그것이 올바르다 할지라도 그런 말을 하는 건 ‘별로 멋있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특히 그때는 한창 주변에 멋지게 보이고 싶은 나이가 아닌가. 따라서 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은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마치 자신이 깨어있는 척, 멋진 척, 정의로운 척을 하며 사람들에게 이렇게 떠들어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자본주의는 1%만을 위한 체제야...” “북한이나 한국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니까?” 물론 여기에 대해 ‘왜?’ 라며 구체적인 이유를 물으면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지만 말이다. 또 하나 좌파 사상의 커다란 매력은 사람들에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환상’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공부도 못하고, 제대로 하는 건 아무것도 없이 부모님에게 의존해 사는 일반 청년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럴 때 “내가 열심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무엇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 됬구나! 열심히 노력해서 여기에서 벗어나야지!” 라고 다짐하는 인간은 정말 거의 없다. 그것은 나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직면하고 인정해야만 가능한 다짐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남탓과 세상탓에 빠져 현실을 부정하며 살아간다. 하기야 자기가 못난 인간이고, 앞으로 더 고통스럽게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달가워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을 시인하는 것은 정말이지 극도의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다. (본인이 겪어봤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안다.) 이럴 때 좌파들은 달콤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니가 이렇게 된 것은 너때문이 아니라, 부자들, 기득권들, 금수저들 때문이라고. 분노하라고. 대한민국은 원래부터 썩은 나라라고. 이러한 주장들이 무서운 것은 단지 그것들이 거짓이라는 데에 있지 않다. 진짜 문제는 그것들이 청춘으로 하여금 노력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어짜피 서울대는 금수저만 가는 곳이고, 대학입시제도는 썩었으며, 나는 흙수저로 태어나 공부를 못한다는 사실을 같이 다니는 좌파들에게 주입받자 내 마음 속에 남아있던 최소한의 공부 의지마저도 사라져버렸다. 날마다 생기는 감정은 오직 분노일 뿐이었다. 부모님에 대한 분노. 금수저에 대한 분노.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 대한민국에 대한 분노. 날마다 ‘나는 왜 이따위 나라에서, 이렇게 태어났을까?’ 하는 생각만이 머리를 채웠고, 그럴수록 성적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성적이 떨어지자 나는 나의 훼손된 자존심과 자의식을 또다시 좌파 사상으로 채워넣기 시작했다. ‘내가 공부를 못하는 것은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다. 너희들과 다르게 나는 깨어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도 안되는 주문을 스스로에게 외우면서 말이다. 솔직히 말해 이때 제대로 공부를 했던 날들보다도 ‘노동자 청소년단’ 같은 알수 없는 모임을 따라가 시위에 참가했던 날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조언을 해주는 친구나 어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를 따로 불러 정신좀 차리라며 따끔하게 조언해줬던 선생님도 있었고, 내가 계속 사회에 대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늘어놓자 정규재 선생님의 강의나 우파 관련 책들을 추천해주며 미몽에서 깨어나라고 말해줬던 친구도 있었다. (10대 나이에 그정도 수준에 이르다니! 나는 아직도 그 친구가 너무 고맙다) 그러나 자의식 과잉의 10대에게 이런 이야기들은 그저 소귀에 경읽기였다. 오히려 내 반발심만 더 크게 만들었을 뿐이다. 여느 좌파들이 팩트에 기반한 비판을 받으면 그러하듯, 나는 저런 말들은 사회에 순응한, 세뇌된 자들의 헛소리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좌파 사상에서 완전히 탈피할 수 있었던 것은 하위권 대학에 합격한 다음이었다. 수능을 보고 성적표를 받았던 날, 내가 그때 느꼈던 감정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놀랍게도 성적표에는 3등급을 넘어선 성적을 하나도 확인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공부를 중상위권은 유지했던 나였는데 고작 이정도 성적이라니. 나는 정신이 멍멍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세상탓, 남탓, 부모탓 그 어떤것도 할 수가 없었다. 20년치의 공부를 한눈에 보여주는, 수능이라는 성적표가 내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순수한 너의 실력이고, 네가 노력하지 않은 데 대한 정직한 대가라고. 이 등급을 거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이다. 나는 성적표를 받은 자리에서 쭈그려앉아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나는 밑바닥 끝으로의 추락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제대로 직시하게 되었다. 세상에 분노하기 이전에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고, 이것을 바꾸어나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답은 간단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재수하는 것. 그리고 집에 충분한 돈이 없으므로 스스로의 생활비는 스스로 버는 것. 그리고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생각보다 대한민국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국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힘든 과정이긴 했지만 노력하자 성적은 지속적으로 올랐고, 알바도 꾸준히 하자(다양한 알바를 해봤지만, 많은 청년들이 불편하는 것처럼 그렇게 힘든 것은 거의 없었다.) 돈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재수를 거쳐 최하위권 대학에서 그럭저럭 수도권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는 성적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내가 그토록 혐오하던 우파 사상을 접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자 내가 그동안 세상을 바라봤던 관점에도 의문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생 시절 쳐다보지도 않았던 정규재 주필님의 강의와 김정호, 이영훈 등 우파 교수님들의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전에 없던 충격을 받았다. 놀랍게도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은 모두 가짜 선동에 날조된 엉터리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헬조선’ 이나 불평등한 국가가 아니었다. 또한 자본주의는 내 생각만큼 불의한 체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합리적이고 공정한 체제였다. 인류 최악의 학살과 재앙은 오히려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뛰어난 공헌 위에, 수많은 미군과 국군이 피로써 지켜내며 건국된 소중한 자유 민주주의의 국가였다. 사실 나는 무언가에 분노해야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 너무나 행복하고 또한 감사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여기에는 그 어떤 의문도 표시할 수가 없었다. 좌파들과 다르게 우파분들은 감정을 자극하는 것 대신, 명확한 자료와 객관적인 통계를 가지고 논리로써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번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한 사람들이 다시 좌파로 돌아서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그순간, 그야말로 내 지난 20년 세월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까운 학창시절을 낭비했던 것인가. 내가 그때 품었던 분노와 증오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시간을 되돌릴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늦지 않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런 분들을 접하게 된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내가 최종적으로 좌파들과 손을 끊고 우파로 완전히 돌아서게 된 것은 바로 ‘북한 인권’ 문제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접하고 이것에 관해 좌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이전에, 나는 그래도 좌파들이 따뜻한 감성을 지니고 진정으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하는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이 말도 안되는 선동에 휘둘리는 것은 그저 머리가 조금 나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생각은 북한 인권문제를 접하며 완전히 무너졌다. 더러운 악인일수록 겉으로는 도덕을 내세우는 경향이 강하듯, 실상 그들만큼 인권과 민주주의를 앞세워 반(反) 인권, 반(反) 민주주의를 자행하고 있었던 이들도 없었던 것이다. 반디의 <고발>, 비탈리 만스키 감독의 <태양 아래>. 북한에 살고 있는 실제 인물들의 목소리를 통해 북한인권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이 소설과 영화는, 인간이라면 정말이지 분노할 수밖에 없는 김씨왕조의 잔혹한 인권유린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별 사소한 문제에 인권과 민주주의의 침해라며 거품을 물던 좌파 동기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심지어 북한을 옹호하며 이러한 작품들이 보수세력들이 날조한 것 같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거칠게 반박하며 따지고들자 그들은 한국의 군사정권이나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도 크게 다를 바 없다며, 정말 중요한 것은 통일이고 평화라고 나에게 강조했다. 나는 너무나 황당했다. 한국의 인권 현실이 아무리 열악하다 한들 그것을 어떻게 북한에 비할 수 있으며, 나아가 북한 인권없는 통일 논의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인가. 아아, 나는 그 순간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들에게 인권과 민주주의는 실상 우리 정부를 비난하고 자신들의 왜곡된 신념을 지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10대 시절의 철없는 분노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진정한 ‘분노’를 그들에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좌파 사상을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웠다. 좌파에서 빠져나온 지금은 어떻냐고? 비록 완벽한 상위권 대학에 다니지 못하고, 엄청나게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너무나 행복하다. 10대 시절의 어리석은 분노에서 빠져나와 생산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고, 내가 태어난 이 세상이 얼마나 행복한 세상인지 알게 되었으며, 자유 민주주의적 질서를 지켜나가고 발전시킨 분들에게 감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우파로 전향하면서 ‘내가 노력하면 변할 수 있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조금 힘들지 몰라도 나는 그래서 매일매일이 즐겁다. 현수환(23·대학생/대상 수상자) hard-boiled@naver.com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7613)
2018-07-10 13:59:31 | 관리자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게 되는 정말 훌륭한 칼럼입니다.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07-09 20:41:48 | 장용철
요즘 저는 펜앤드마이크의 귀한 글들로 인해 마음이 매우 부해졌습니다. 정신이 올바른 사람들의 가치 있는 글들을 접하면서 아직 큰 희망이 있음을 봅니다. 말과 글이 사람을 바꿉니다.다음과 같은 글을 많이 읽어서 머리에 기름을 쳐야 합니다. 모두를 공멸로 이끄는 좌파들의 사회주의에서 탈출하는 것은 지능 순입니다.지능은 많이 읽고 생각하는 데서 생깁니다. 어떻게 버는 것이 없이 부유해지겠습니까?그렇게 선동하는 자들에게 넘어가지 않으려면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비뚤어진 것 즉 좌(Left)를 미워하십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올바른 것 즉 Right의 하나님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말과 글로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고 국가를 살리는 많은 사람들이 생겨나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패스터 ------------하이에크가 말해 주는, 우리는 감히 말 못하는 한국의 현실 좌파와 우파가 있다. 좌파는 진보, 민주화, 주사파, 친북, 종북이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빨갱이’라는, 이제는 사적 대화의 수면 밑으로 숨어 들어간 매우 논쟁적인 이름도 있다. 우파는 보수, 반공, 산업화, 군사정권, 권위주의, 친일파 등의 이름이 있고, 조롱의 함의를 지닌 태극기, 틀딱 등의 별명을 갖고 있다. 사상적으로 좌파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있고, 우파는 반공, 자본주의, 자유주의, 시장경제, 개인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특정 개인들이 들쑥날쑥 편차를 보이기는 해도 대강은 이런 범주화 속에 들어있다. 우파는 좌파가 민주, 진보라는 단어를 선점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좌파는 자신들이 사회주의 혹은 좌익으로 불리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자신의 저서 『노예의 길』에서 좌파를 계획(planning) 또는 집단주의(collectivism)로, 우파를 자유주의(liberalism) 혹은 개인주의(individualism)로 부른다. 계획-집단, 자유-개인이라는 이 두 쌍의 단어야말로 좌파와 우파를 압축적으로 규정해 주는 용어가 아닐까? 계획과 집단주의 지금 한국의 집권 세력은 경제 흐름을 자연스럽게 시장에 맡기는 대신 모든 것을 시시콜콜 계획하고 지시하는 계획가들이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직접 인천 공항에 가 비정규직을 없애라고 지시를 내리더니 엊그제는 중고생들의 교복 존폐까지 언급 했다. 소득주도 성장을 신봉하여 주 52시간의 근로시간, 최저임금 16% 인상 등을 자의적으로 결정했으며, 에너지 정책을 원전에서 태양광으로 바꿨다. 월성 원전 1호기를 조기 폐쇄하고, 신규원전도 백지화하여, 수 천 억 원의 손실비용은 물론 연간 9만 2천 명의 고용유발 효과까지 날려 버렸다. 경제성보다는 단지 환경문제라는 자신들의 가치에만 맞추어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러나 태양열 집열판을 설치하기 위해 숲을 베어버려 결과적으로 환경파괴가 일어난 것은 아이러니다. 대학에 원자력 전공 학생이 하나도 없게 되어 학문 분야의 왜곡도 심각하다. 이것이 계획의 실상이다. 계획이란 원래 문제를 가능한 한 합리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최대한의 예지능력을 동원하는 과정이다. 계획을 훌륭하게 세웠느냐 잘못 세웠느냐의 차이, 현명하여 먼 앞날을 내다보고 세웠느냐 혹은 어리석어 눈앞의 일만 생각하고 세웠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의 행위는 모두가 계획이다. 계획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존재 양태이다. 완전한 숙명론자가 아닌 한, 우리 모두는 계획자이며, 모든 정치적 행위는 계획행위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주의자들을 ‘계획가’라고 말할 때, 그리고 그 계획가들이 소득과 부의 분배를 특정한 기준에 일치하도록 계획하려 할 때, 그것은 인간의 실존적 존재 양태로서의 계획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 특정의 자원을 특정한 방식으로 써야 한다고 국가가 국민에게 강제로 지시한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모든 경제활동이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중앙지시체제이다. 따라서 계획가들의 ‘계획’은 개인의 자유 자체를 아예 부정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이다.이런 계획을 원활하게 밀고 나가려면 자신들을 지원해 줄 대규모의 집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집단주의와 계획(planning)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대통령이 직접 자신들은 촛불세력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듯이, 현재 한국의 집권 세력이 집단주의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효선-미선 교통사고와 광우병 사태를 빌미로 반미 시위를 격렬하게 벌였고, 세월호 사고로 반정부 시위를 이어가다가 결국 촛불 시위로 현직 대통령을 탄핵시켜 정권을 무너뜨린 집단이다.일반적으로 교육수준과 지적 능력이 높아질수록 개인들의 견해와 취향은 다양해진다. 특정한 가치체계에 획일적으로 동의할 가능성도 줄어든다. 반대로 좀 더 낮은 도덕적 수준과 좀 더 낮은 지적 수준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 높은 통일성과 더 높은 획일성을 보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권력을 잡거나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거대집단은 결코 취향이 고도로 분화되고 발달된 사람들의 집단이 아닐 것이다. 계획가들이 원하는 집단은 전혀 독창적이지 않고 독립적이지 않으며, 오로지 다수라는 숫자의 힘만을 가진 그런 집단이다. 이 집단은 프로파간다에 취약하고, 소문에 쉽게 속아 넘어가며, 감성적 선동의 먹이가 되기 쉽다. 이 거대한 대중이야말로 전체주의 정당의 부피를 한껏 부풀려주는 인적자원이다. 이들을 지속적으로 견고하게 묶어주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적대하여 싸워야 할 대상이나 소재를 제공해야 한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것보다 적에 대한 혐오 등 부정적인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법이다. 부자들에 대한 질시는 가장 피부에 와 닿는 좋은 소재다. 친일파 문제도 더 없이 좋은 소재다. 위안부 문제, 제주 4.3 사건 등 집단 동원의 소재를 끊임없이 지역 속에서, 혹은 역사 속에서 발굴해 낸 우리의 집단주의 계획가들은, 지금은, 전 정권과 전 전 정권의 비리를 캐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돈은 천하다고? 한국 사람들은 흔히 돈은 천하고, 경제 활동은 삶의 열등한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가난을 공직자의 절대적인 장점으로 여겨, 서울 시장의 재산이 마이너스 통장뿐이라는 코믹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한국 사회는 그런 점에서 아직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돈을 천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사회주의자들 역시 경제적인 문제를 한없이 경멸한다. 경제적 이득을 죄악시 하여 기업에게 원가 공개를 하라고 다그친다. “경제적으로 좀 잘 살게 되었다고 과거보다 우리가 얼마나 더 행복해 졌는가?”라는 게 좌파 문필가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입시키는 청빈 사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자랑스러운 청빈을 소유했으면 됐지, 왜 천한 돈을 가진 부자들을 그렇게 죽기 살기로 비판하는지 모르겠다. 과연 물질적 경제는 천한 것이고, 정신의 영역은 고귀한 것일까? 돈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병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인간사에서 순전히 배타적으로 경제적이기만 한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돈에 대한 욕구는 일반적 기회에 대한 욕구, 즉 구체화되지 않은 목적들을 성취할 수 있는 힘에 대한 욕구이다. 우리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돈이 우리에게 노력의 열매를 향유하는 데 가장 큰 선택의 폭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돈은 사람이 발명한 것 중 가장 큰 자유의 수단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다. 돈을 천시하는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제안하듯 어떤 임무나 근로에 대한 보상을 금전으로 하지 않고 비경제적 인센티브(non-economic incentive)로 대체한다고 생각해 보자. 즉 모든 보수를 돈으로 제공하는 대신, 공적 명예나 특권, 타인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 더 나은 주택, 더 나은 음식, 여행, 교육기회 등의 형태로 제공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보수를 받는 사람은 결코 만족해하지 않을 것이다. 즉 여행을 가고 싶지 않은데 티켓으로 여행을 가야하고, 더 나은 주택은 필요 없는데 새 주택으로 이사를 가야하고, 공부는 하고 싶지 않은데 영어 학원에 등록을 해야 하는 식이다. 나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나에게 내 인생을 선택할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보수를 제공하는 주체가 회사든 국가든, 그는 나의 자유를 박탈하여 나의 라이프스타일까지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횡포를 부리는 것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재산권을 자유와 직결시켰듯이, 결국 돈은 곧 자유다. 그래서 우리의 계획가들은 국민들에게 현금을 마구 뿌리는가? 우리가 낸 세금이 마치 자기 돈인 양 그들은 국민들에게 공짜 돈을 나눠주고 있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도내 만 24세 청년 16만6000명에게 연간 100만 원을 지급하기로 했고, 최문순 강원지사는 매달 출산 가정에 70만 원을, 청년수당으로 60만 원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이런 체제에 길들여지면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할 능력을 아예 상실한다. 젊은이들에게 독립 정신이나 강인한 성격을 키워주기도 어렵다. 미래의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가 될 싱싱한 젊음들이 1년에 고작 100만원을 공짜로 받음으로써 무기력한 노예가 되어 가는 사회는 참으로 가공할만한 디스토피아다. 사회주의자는 경제를 계획하는 계획가들이라고 하이에크는 말했지만 우리의 계획가들은 아예 경제를 계획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계획 없는 계획가들이다. 시장경제 시장은 화폐를 매개로 상품이 거래되는 장소이다. 사회주의는 시장경제를 부정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이상인 자유와 평등이 성취되고, 인류가 계급 사회에서 자유 사회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시장경제 덕분이었다. 시장을 통해 부를 축적한 하층민이 정치적 자유를 획득해 감으로써 인류의 역사는 근대로 발전하였다. 시장이란 인지적 한계를 지닌 개인들이 경쟁과정을 통해 서로의 지식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한 사람의 장인(匠人) 혹은 상인은 가장 적은 비용으로 제품을 생산할 방법이 무엇인지, 또 소비자들이 어떤 제품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전혀 알 수 없거나, 혹은 부분적으로밖에는 알 수 없다. 개별 인간의 지식은 한계가 있으므로, 혼자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무엇이 잘 팔리고 무엇이 잘 팔리지 않는지를 두 눈으로 보면서 상인은 비로소 소비자가 선호하는 제품이 무엇인지, 그 가격은 어느 정도가 적정한지를 알게 되어 자신의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된다. 이런 정보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습득하는 장소가 바로 시장이다. 시장 참여자들은 팔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만들거나 가져와 팔고 산다. 상품의 가격도 자유롭게 결정된다. 옆 가게의 물건 값이 싸서 잘 팔리면 우리 가게도 값을 내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그 누구의 강제도 개입되지 않는다. 이처럼 시장기능은 단순히 상품의 유통만이 아니라 지식의 한계를 극복하는 의사소통 과정이다. 서로 다른 다양한 가치체계를 가진 개인들이 시장을 통해 평화롭게 상호작용을 한다. 그런데 정부가 특정 상품에 대한 가격이나 물량을 통제하면, 가격은 잔뜩 경직되어 더 이상 주변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다. 따라서 더 이상 개인들이 자신의 미래 계획을 세우는 데 참고할 만한 길잡이가 되지 못한다. 좀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를 끌어 모으겠다는 경쟁이 필요 없게 되어, 개인 각자의 노력이 적절하게 조정되는 기능도 사라진다. 시장경제는 한 마디로 자유 속에서의 경쟁이다. 그러나 본성상 허약한 인간은 언제나 경쟁을 두려워한다. 자유 또한 두려워한다. 자유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스스로 뭔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너무나 불안하고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군가가 정해준 방법을 그대로 따르는 수동적 예속의 길을 더 좋아한다. 집단주의적 계획가들이 크게 성공하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시장경제를 부정하면 노예의 길이 있을 뿐이다. 계획가들이 경제문제를 계획하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에게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존중하고, 어떤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할지, 한마디로 무엇을 믿고 노력해야 할지를 정부가 우리 대신 결정해 주기 때문이다. 계획가들의 정부는 단순히 우리 삶의 일부인 경제만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는 모든 목적들의 수단이므로, 경제를 계획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목적까지 결정해 주는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의 삶 자체를 통제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초적 필요들로부터 가족과 친구 관계까지, 우리의 직업의 성격으로부터 여가사용에 이르기까지, 계획가들은 모든 권한을 행사한다. 누군가는 저녁이 있는 삶을, 누군가는 아침이 있는 삶을 원하고, 또 누군가는 저녁을 번화한 상점가에서 왁자지껄하게 직장 동료들과 대화하며 보내기를 원하고 또 누군가는 호젓하게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 그런데 왜 국가가 일률적으로 모든 국민에게 호젓한 가족과의 저녁 시간만을 강요하는가? 그것도 근무시간 감소로 인한 실질적 급여감소와 함께 말이다. 돈만 많이 벌게 해주면 근로자들은 자기가 알아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할 수 있을 텐데, 모든 일자리의 근원은 하나같이 다 막으면서 말이다. 자유와 개인주의 이탈리아의 팟시즘, 독일의 나치, 소련의 공산주의, 북한의 주체사상 등 모든 전체주의 체제는 집단주의(collectivism)다. 반면 우파 자유주의의 기본 이념은 개별 인간을 존중하는 개인주의다. 르네상스 이래 발전된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서구는 자유주의 개념을 정립하였다. 개인주의가 보기에 인간이란 그 어떤 집단에 속하기 전에 우선 하나의 독립적 개인이다. 이것이야말로 개인주의의 인본주의적인 성격이다. 사회주의자들이 흔히 ‘사람이 먼저다’ 같은 말을 구호로 내걸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집단일 뿐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인간은 집단 속에 매몰되어 있다. 북한에서 집단체조에 동원되는 어린 소녀들을 생각해 보라. 거기 어디에 개인이 있고, 인간 존중이 있는가? 개인주의자들은 다른 사람의 가치나 선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와 선호에 따라 행동한다. 즉 개인의 목적체계가 최고의 선이며, 다른 그 누구의 그 어떤 지시에도 종속되려 하지 않는다. 물론 개인주의는 공통의 사회적 목적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개인의 목적들이 우연히 일치되고, 그 일치된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결합하는 것이 바람직한 상황이 있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그러한 공동의 행동을 단지 개인들의 이해(利害)가 일치하는 경우로 한정한다. 여기서 박정희의 계획경제가 정당화된다. 많은 젊은 우파들이 박정희의 개발 경제가 계획주의였다고 비판하지만, 서구에서 수 백 년 간 축적된 자유주의 경제를 불과 몇 십 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루기 위해 계획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게다가 ‘잘 살아보세!’라는 국민들의 자발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개인주의의 관점에서 이른바 사회적 목적이란 단지 많은 개인들의 동일한 목적에 불과하다. 이처럼 자발적 합의가 이루어졌을 때 집단적 행동은 국가 전체의 행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합의가 존재하지 않으면서 국가가 직접 통제를 행사할 때,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20세기 초에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의 자유보다 더 큰 자유를 주겠다며 선동하고 나섰다. 비록 경제적 자유는 좀 희생시키더라도 더 큰 정치적 자유를 실현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가 과연 별개의 것인지, 경제적인 자유 없는 정치적 자유가 과연 존재하는지는 의문이다. 만약 자유로 가는 길이라고 약속된 것이 실제로는 예속으로 가는 첩경임이 판명된다면, 그렇게 속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인생은 누가 책임져 줄 것인가? 토크빌(Tocqueville)이나 액턴(Acton) 같은 정치철학자들은 이미 “사회주의는 예속을 의미한다”(Socialism means slavery)고 경고한 바 있다. 토크빌은 아예 “민주주의는 자유에서의 평등을 추구하지만 사회주의는 제약과 예속에서의 평등을 추구한다”(토크빌 전집 X권)고 말함으로써 민주주의란 본질적으로 개인주의 제도이며, 사회주의와는 결코 화해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법의 지배와 자유 자유주의 사회와 전체주의 사회를 구별해 주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 바로 법의 지배(rule of law)다. 자유주의 사회는 법의 지배하에 있는 사회이고, 계획사회는 법의 지배가 없는 사회이다. 정부가 하는 일이 다 법에 의한 것이고, 한 치도 법에 어긋남이 없으면 그 사회는 법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가? 그렇지 않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모든 것을 법제화(legalise)하지만, 실제로 그 권력은 법이 아니라 무제한의 강제를 휘두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개인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법률조차 다수가 동의하면 합법적으로 입법할 수 있다. 그러니까 법의 지배라는 말과 합법적(legal)이라는 말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입법에 의해 정당하게 권위를 인정받기만 하면 국가의 모든 행동이 법의 지배하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는 것은 공허한 입법권 사상이다. 정부의 모든 행동들이 완전히 합법적이면서도 여전히 법의 지배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어떤 위원회의 설치를 법률로 정했다고 치자. 그 위원회가 하는 일은 모두가 합법적이다. 그러나 그 위원회의 행동들이 법의 지배(rule of law)하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배 권력의 자의성일 뿐이다. 전체주의 사회는 정부에 무한정의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가장 자의적인 규칙도 얼마든지 합법화 할 수 있다. 민주정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독재조차 합법적 제도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제도다. 예를 들어 히틀러가 그의 무한정의 권력을 완전히 합헌적 (constitutional) 방식으로 획득했고,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법률상의 의미로 볼 때 합법적일(legal)지라도 나치 독일에 법의 지배가 있었다고는 누구도 감히 말할 수 없다. 반면 법의 지배가 지켜지는 자유사회에서 정부는 결코 자의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권력자가 결코 자기 마음대로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 정부가 행하는 모든 행동은 미리 고정되고 선포된 규칙들에 의해 제약받는다. 이런 규칙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인들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정부가 어떻게 강제력을 사용할 것인지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으며, 이런 지식의 기초 위에서 자신의 일들을 계획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정부가 모든 것을 자의적으로 결정한다. 얼마나 많은 돼지들이 사육되어야 하고, 얼마나 많은 버스들이 운행되어야 할지, 혹은 어떤 에너지를 생산하고, 어떤 가격에 스마트폰을 팔아야 할지를 모두 정부가 결정한다. 당연히 매번 다양한 사람들과 단체들의 이익이 상충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조정하기 위해 결국 누구의 이익이 보다 중요한지를 정부가 나서서 결정해야 한다. 그 결정의 범위가 확대될수록 정부의 힘도 정비례로 커진다. 이렇게 되면 법은 더 이상 공리적 도구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하나의 도덕적 제도가 된다. 이때 ‘도덕적’이라는 말은 ‘비도덕적’이라는 말의 대비가 아니라, 도덕적 문제에 있어서까지 정부가 자신의 견해를 모든 구성원들에게 강요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원래 도덕이란 개인의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닌가. 개인이 자유롭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분야, 즉 개인이 자신의 이득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도록 요청되는 분야에서만 도덕은 도덕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계획가들은 도덕 문제만이 아니라 감성의 문제까지 계획하려 한다. 세월호 여고생들의 죽음이나 80여 년 전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모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며 우리의 기억 영역에까지 강제력을 확대시킨다.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주장은 이미 금기어가 된지 오래 이고, 공감능력 부족이라는 것은 거의 반사회적 범죄와 동일한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공동체니, 공감이니 하는 말을 즐겨 쓰는 세력을 경계해야 한다. 냉정하고 이성적이어야 할 공적 담론을 ‘대통령의 말에 울음이 묻어있다’느니, ‘첫 눈 오는 날 놓아 주겠다’느니 등의 감성적 언어로 가득 채우는 권력자들과 그들의 권위를 합리적으로 의심해 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이름은? 법의 지배란 결국 법 앞에서 누구나 평등함을 보장해 준다는 의미다.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불이익을 받아도 안 되지만, 돈 많은 재벌이라고 해서 법에도 없이 함부로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법의 지배만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임마누엘 칸트가 말했듯이, 그리고 볼테르가 칸트 이전에 매우 유사한 용어를 써서 표현했듯이, “그 어떤 다른 사람도 따를 필요가 없고 단지 법만 따르면 될 때 우리는 자유롭다(Man is free if he needs to obey no person but solely the law).”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법대로 하면 구속 사유가 아니지만, 요즘 법관들이 어디...”라고 뒤끝을 흐리는 말들이 주변에서 자주 들린다. ‘떼법’이나 ‘국민정서법’이 위력을 발휘하는 사회다. ‘헌법 수호 의지가 없다’는 모호한 죄목이 대통령 탄핵의 사유가 되는 사회다. 우리는 이런 사회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하이에크는 그것을 전체주의 사회라고 불렀다.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상명대 명예교수)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7612)
2018-07-09 16:36:33 | 관리자
사람이 먼지보다 작다는게 비유가 아니었네요.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저의 존재에 대해 묵상하게 되니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2018-07-09 11:17:35 | 김상희
귀한 말씀과 글들로 인간이 무엇인지...그리스도인이 어떠한 마음가짐과 자세로 살야가야하는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07-09 10:53:46 | 장용철
개인의 자유와 권리, 책임을 목사와 교회에 넘겨주면 교회교의 부품이 되고 맙니다. 어느 학교를 갈지, 어느 직장을 갈지, 어느 집으로 이사갈지, 어느 병원에 갈지, 심지어 결혼도 누구와 할지 목사와 교회에 선택권을 넘겨버린 좀비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종과 교회에 인생을 맡겨 평안하다는 괴상한 논리에 세뇌되어 행복하다고 느끼며 삽니다. 개인의 자유를 지키고 키우는 것. 그리고 책임을 진다는 것에 부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신약시대에 성도가 성경적인 삶을 사는 올바른 길이라고 믿습니다.
2018-07-09 10:33:36 | 정관영
안녕하세요?
오늘은 오묘한 신비를 하나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평범한 물질의 대다수는 속이 비어 있습니다. 즉 물질의 99.9999999%는 속이 비어 있습니다.
다음 그림은 원자를 보여 줍니다. 원자는 99.99%가 비어 있습니다.
원자 속에서 빈 부분을 다 빼내고 나면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70억)은 조그만 설탕 조각 하나 정도의 체적(약 2.5세제곱 센티미터)을 차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큰 신비입니다.
사람은 실제로 먼지보다 더 작습니다.
그러므로 위대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샬롬
패스터
http://www.businessinsider.com/14-facts-about-the-universe-2016-8#if-you-unraveled-all-of-the-dna-in-your-body-it-would-span-34-billion-miles-reaching-to-pluto-266-billion-miles-away-and-back—six-times-1
https://www.reddit.com/r/askscience/comments/2n9oev/if_you_remove_all_the_space_in_the_atoms_the/
https://youtu.be/lD3TMWQKzEs
2018-07-09 10:26:29 | 관리자
목사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2018-07-07 19:13:53 | 오영임
국가를 위해 더욱더 기도해야 한다. 안녕하세요? 요즘 슬그머니 국가의 안보를 부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이저 언론들은 거의 보도를 하지 않습니다. 1. 국방부가 비무장지대(DMZ) 평화지대 조성을 위해 전방 일반 전초(GOP) 등에 위치한 98개 주둔지 철수방안을 검토하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8070609273188052 2. 현시대 문제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JTBC가 평양에 지국을 만들고 직원을 보낼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미 북한의 승인이 났다고 합니다. 평양 지국 설립신청의 경우 KBS, JTBC, 연합뉴스 등이 신청했지만, 북한에서는 JTBC만 초청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렇게 홀로 선정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지혜로운 독자라면 다 알 것입니다. 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7581 이런 것 정도는 알아야 좋은 시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실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거짓 선동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4대강 사업은 물 부족을 해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녹조 라떼’, 그거 진짜 ‘4대강 공사’ 때문 맞아?> 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7489 <4대강 사업으로 인해 홍수와 가뭄이 안 나는 것> 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7542 <대한민국이 몰락한다면 지식인의 훼절이 본질적 요인> 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7517 샬롬 패스터
2018-07-07 12:28:03 | 관리자
그동안 교회가 무엇인지 많이 생각해 왔는데..
결국 교회 안에서의 개인의 존재감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며 내 것은 내가 지킨다는 각오 없이는 내가 속한 내 교회가 성장할 수 없다는 점에 깊이 공감합니다.
리버티의 의미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8-07-07 12:21:18 | 김상희
단번 속죄의 의미 구약 시대 이스라엘은 규례에 따라 집단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매해 다음과 같은 수의 짐승을 죽여 주님께 희생물로 바쳤습니다(민수기 28-29장, 레위기 23장 15절 이하, Dr Waite). 1. 매일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730마리2. 매주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208마리3. 매달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168마리4. 매해 유월절에 죽여서 드리는 어린양 1마리5. 무교절에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91마리6. 초실절에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10마리7. 오순절에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13마리8. 나팔절에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12마리9. 속죄일에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10마리10. 장막절에 죽여서 드리는 희생물 짐승 218마리 매해 적어도 총 1,461마리의 희생물을 주님께 드림. 이 외에도 자원 헌물로 원하는 대로 주님께 희생물을 드림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은 단 한 번 자신을 완전한 희생물로 영원히 드림으로써 더는 이런 희생물을 드릴 필요가 없게 됨. 할렐루야! 다음 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1;29). 히브리서 9장 11-15절 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더 완전한 성막을 통해 오셔서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 13 황소와 염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육체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는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얼마나 더 많이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느냐? 15 이런 까닭에 그분께서는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이시니 이것은 첫 상속 언약 아래 있던 범법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영원한 상속 유업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10장 11-14절 11 제사장마다 날마다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물들을 드리되 그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해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13 그 이후부터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받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느니라. 14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 헌물을 드림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장 18절 이제 이것들[죄들과 불법들]의 사면이 있는 곳에서는 다시는 죄로 인한 헌물이 없느니라.
2018-07-07 09:22:29 | 관리자
조직은 작게하고 자발적인 참여를 많이 하는것이
맞는것 같습니다~!!
2018-07-06 17:26:30 | 조성재
어메리칸 리버티와 정부 그리고 교회 미국을 만든 창설자들(Founding fathers)은 신약성경에 근거해서 개인의 자유(Soul Liberty)가 훼손되지 않는 수준의 작은 정부를 꾸며야 함을 명시하였고 그것을 실현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럽의 전체주의 역사를 통해 한 국가의 정부는 국방, 치안 등 최소한의 공공복지를 위해 존재해야 하며 그 이상이 되면 개인의 자유가 침식되고 결국 전체주의 독재로 멸망함을 깨닫고 이러한 과오를 벗어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역량을 강조한 결과 미국은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잘 살며 인권을 존중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좌파들이 미 제국주의 운운하면서 미국을 폄하하지만 지금까지 인간이 만든 모든 국가 중에서 가장 좋은 국가는 미국입니다. 그래서 좌파들 대다수도 아이들을 미국에 보내 교육하려 합니다. 물론 러시아나 중공 혹은 북한보다는 미국에 가서 살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정신을 그들은 어메리칸 리버티(American Liberty)라고 말합니다. 정부가 커지면 커질수록 자연히 개인은 정부에 의존하게 되고 결국 굴종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회주의 좌파 국가들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는 영혼의 자유를 가장 큰 가치로 여깁니다. 이를 위해 교회의 조직이 거의 없습니다. 즉 성경과 상식을 기초로 한 교회 헌법이라는 틀 안에서 모든 성도는 마음 놓고 신앙생활을 해도 됩니다. 목사나 교회 조직이 미주알고주알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습니다. 혹시 앞으로 교회가 더 커진다 해도 우리는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직만 유지할 것입니다. 그래야 성도들의 개인의 자유가 존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규모 정부나 조직으로 단체가 유지되려면 구성원들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경우 어떤 분들은 교회나 목사가 일일이 자기들의 모든 것에 관여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는 이것이 매우 힘듭니다. 일단 조직도 없고 그리함은 우리 교회의 철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사람(Right person)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모든 것을 지킵니다. 정부나 교회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개인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미국의 보수주의자들과 우리 교회는 오른쪽(Right)의 가치라고 말합니다. 말 그대로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것입니다. 내 영혼, 내 가정, 내 직장, 내 복지......누가 이런 것들을 지켜야 할까요? 내가 지켜야 한다고 해야 올바른 사람입니다. 즉 우파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물질적으로도 성공합니다. 왜냐하면 이를 위해 자연히 열심히 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프로테스탄트 국가와 국민은 대개 다 잘 삽니다. 국가나 교회가 해 주기를 바라면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상 의료, 무상 교육, 무상 혜택 등을 남발하는 국가와 그 국민들은 결국 다 망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책임진다!” 이것이 어메리칸 리버티이며 이것을 가장 잘 구현한 교회가 바로 미국의 침례교회입니다. 그래서 어메리칸 리버티에 근거한 침례교회가 미국에서 가장 발달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내 것은 내가 지킨다!”는 각오를 가진 성도들이 넘쳐나면서 모두가 개인의 자유와 역량을 잘 발휘하여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좋은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조직은 작게 하고 자발적인 참여는 많이 해야 합니다. 이러면 예수님의 리버티를 크게 누리는 좋은 성도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리버티가 바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리버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유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그 자유 안에 굳게 서고 다시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Stand fast therefore in the liberty wherewith Christ hath made us free, and be not entangled again with the yoke of bondage. 샬롬 패스터
2018-07-06 13:40:06 | 관리자
안녕하세요?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가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겪는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좋은 글을 찾아서 읽을 줄 아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읽지 못하면 좋은 설교나 강해 연설 설명 등을 찾아서 듣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외딴 섬이 되고 맙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외딴 섬 - 대개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비침 - 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겸손히 낮추어서 배워야 합니다. 성경도, 세상도. 그리스도인도 세상을 사는 사람이기에 세상일도 잘 관찰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바른 것을 전달해 주는 매체를 잘 선정해야 합니다. 대다수는 신문이나 TV를 봅니다. 그런데 미국을 포함한 대다수 국가의 메이저 언론들은 이미 좌익에 의해 점령을 당해 바른 기사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고 가짜 뉴스를 양산합니다. 그 결과 선동에 속아 넘어간 대중들은 아무 생각 없이 후닥닥 일을 저지르고 그 뒤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일이 매일, 매달, 매년 반복되지만 대중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글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은 글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 나라는 현재 자유 민주주의냐, 사회주의냐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이 억압되면 그리스도인이 온전하게 믿음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자유가 얼마나 귀한지는 억압을 당해 보면 알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역사를 통해 사회주의의 폐해를 깨닫고 억압을 당해 직접 맛을 보기 전에 막으려고 애를 씁니다. 이러려면 바른 정보가 필요합니다. 요즘 저는 펜앤드마이크 기사를 자주 봅니다. http://www.pennmike.com/ 과거에는 조선일보 등을 보았지만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로는 거의 참조하지 않습니다. 창간된 지 얼마 안 된 펜앤드마이크를 보면 글의 수준이 매우 높고 다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글을 썼기에 읽으면 영혼에 살이 찌는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이런 종류의 고급 기사들을 다양한 방면에서 읽어야 사람의 혼이 바른 기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성경도 다른 글도 모두 문맥을 파악하여 읽고 바르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단이나 좌익 사상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제 TV는 모두 끄고 글을 읽읍시다. 말 그대로 바보 상자입니다!!! 펜앤드마이크말고도 예전에 여러 차례 미래한국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여기 글 역시 좋습니다. http://www.futurekorea.co.kr/ 다음은 엊그제 펜앤드마이크에 올라온 글입니다. 저자는 남정욱입니다. 내용은 사상의 빈곤이 좌익을 통한 국가의 황폐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기독교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국 및 미국의 기독교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어서 더욱 동감이 됩니다. 펜앤드마이크 그리고 미래한국 등에는 정상적인 사람들의 사고력을 키워주는 좋은 글들이 풍성히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좋은 사상가/작가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패스터 ------------애매하게 사망하면 죽어서도 치욕이다 보수 회생을 이야기하면서 배리 골드워터 이름까지 나왔으면 갈 데까지 간 거다. 아시다시피 그는 미국 공화당 역사상 최악의 표차로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인물이다. 선거에서는 졌지만 배리 골드워터는 정치에서는 승리했다. 1955년 창간된 ‘내셔널 리뷰’를 통해 보수 이론이 ‘정립’되고 1960년 ‘자유를 위한 젊은 미국인’이 결성되면서 이론이 ‘운동’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 운동이 배리 골드워터와 결합되면서 정치‘세력화’ 된다. 이른바 ‘배리 골드워터의 아이들’은 1980년 레이건 보수주의 혁명의 중심 세력이 된다. 그래서 정치에서 승리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근데 이건 미국 이야기다. 그 나라와 우리는 정신세계가 완전히 다르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신이 세운 나라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종교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장로교냐, 침례교냐를 묻는 것이지 유교냐, 불교냐를 묻는 것이 아니다. 해서 미국은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기독교 국가다. 당연히 그들은 신 앞에 겸손하고 인간 이성의 불완전함과 인식론의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러한 바탕이 있었기에 미국 보수주의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한국은 어떤가. 물론 우리에게도 천 만 기독교인이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수준으로 떨어진지 오래다. 교회의 세속화 역시 심각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처럼 기독교인들도 정신세계는 불교, 사회생활은 유교 그리고 교회는 일요일에만 기능을 하는 삼권 분립으로 되어있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경계가 모호한 이런 처지에서 보수가 발돋움 할 정신적 토양 같은 건 대한민국에 없다. 민주주의만 이식된 게 아니다. 보수도 이식된 개념이다. 서양의 보수는 출발 자체가 귀족주의이고 이것은 전쟁 나면 저부터 말 타고 나가는 ‘자기 재산 보호’에서 기원한다. 세월이 흘러 기원이 희미해진 가운데 이들의 ‘자기 것 지키기’는 그 형식만 남아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된다. 여기에는 계층 간 갈등을 완화시키는데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이 매우 유용하다는 역사적 교훈도 한몫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전통이 있는가. 물론 자기 것 지키기 전통은 있다. 일제 개막 초기, 의병이 일어나고 독립 운동이 활발했던 곳은 대부분 곡창지대였다. 이 지역은 나중에 친일파의 온상이 된다. 일본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주자 지주들이 대거 친일 성향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냥 ‘지키기’만 있었다. 솔선수범을 보일 기회는 한 번 더 있었다. 6ㆍ25전쟁이다. 당시 미군 장성의 아들이 142명이 참전해서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다. 한국군 장성의 아들이 몇이나 그렇게 죽거나 다쳤을까. 민망해서 차마 소개를 못하겠다. 그러니까 둘 다 없다는 얘기다. 적어도 보수의 원류에서 보자면 한국에는 보수가 없다. 있는 것은 다만 산업화 세력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보수라고 불렀다. 기억과 체험을 공유하는 세대가 주류에서 밀려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간이 그들의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통찰하지 못했거나 인정하기 싫었기에 한국 보수는 분노했다. 잊힌 것이 서럽고 공로를 몰라줘서 야속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국의 유사 보수는 죽어갔다. 보수가 없으니 당연히 보수 정당도 없었다. 이제껏 보수 정당이라 칭해왔던 집단은 다만 성공한 자영업자 연합이었을 뿐이다. 이 정당 역시 사멸하는 것이 운명이었다. 사망시점은 대략 대통령 탄핵 그 즈음이 아니었나 싶다. 사람이 죽고 의사가 진단서를 발급해줘야 공식적으로 사망이 인정된다. 죽음은 1년 여 전이었고 지난 6ㆍ13 지방선거에서 보수가 궤멸한 것은 공식적인 사망진단서 발급이었다. 확실하게 그 죽음을 공인해준 것이다. 한국형 보수는 죽었다. 이 죽음을 어쨌거나 보수정당이라고 자처하는 자유한국당만 모른다. 혹은 모른 척 하고 싶거나. 그래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혹은 믿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다보니 내내 반복하던 짓을 또 한다. 외부에서 위원장을 모셔오는 혁신비대위원회가 그것이다. 참 이해가 안 간다. 왜 자기네 문제를 남을 불러다 해결하려 드는 걸까.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 것일까. 혹시 외부 인사가 엄청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해서 뭔가를 혁신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일시적 봉합에 불과할 뿐이다. 당내 인적 갈등이 여전한데 그 당에 미래가 있을 리 없다. 마땅히 내부에서 나와야 한다. 죽을 때까지 이념 논쟁을 벌이고(죽을 때까지는 은유가 아니라 직유다) 가치를 세우고 비전을 만들어 내야 한다. 상실된 정체성을 회복하고 어젠다를 선점해야 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다. 보수로 분류되거나 자청하는 사람 중에 혁신비대위원회가 하루라도 빨리 가동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여러분은 이미 죽은 것이다. 2년 후 총선? 절대 가망 없다. 자기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는 좀비 떼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그 당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외면당할 것이다. 악플보다 무서운 게 무플이라고 했다. 애매하게 사망하면 죽어서도 치욕이다. 뭐든 해야 한다. 이미 죽었는데 못할 게 뭐 있나. 산업화 보수는 죽었거나 죽기 직전의 숨을 헐떡이고 있다. 시간과 동맹을 맺을 수는 없다. 가능한 것은 세대 간 동맹을 맺는 것뿐이다. 이것을 빨리 깨닫고 실천에 옮기는 것만이 ‘혹시’ 대한민국에서 ‘한국형 보수’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될까. 가능할까. 모르겠다. 아마도 20년 후 쯤의 역사가 답을 해 줄 것이다.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작가)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7497)
2018-07-06 11:23:04 | 관리자
안녕하세요? 그리스도를 신뢰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구원받은 이후에 마음에 맞는 지역 교회를 찾아서 다닙니다. 그런데 또한 누구나 다 여러 이유로 일생 동안 몇 차례 교회를 옮길 것입니다. 화평의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성도는 교회를 옮길 때에도 예의를 가지고 신사답게 옮겨야 합니다. 이것도 인생의 교훈이며 성화의 과정입니다. 우리 교회는 무엇보다 영혼의 자유를 가장 존귀한 가치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이 무슨 이유로 교회를 떠나더라도 그분의 자유를 존중히 여기며 축복해서 보냅니다. 지금까지 12년 정도 목회를 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경험했지만 교회를 떠날 때 한 사람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남을 보았습니다. 교회를 떠날 때 특별히 말로 목사와 교회 자체를 뒤엎으려 시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로 인해 여러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파장이 지속됨을 보면서 참으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목사 그리고 사모, 리더들 그리고 멤버들 모두 불완전한 사람입니다. 다만 성경의 원칙에 따라 바르게 해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이유로든 이 교회를 떠날 때 예의를 가지고 교회에 피해를 주지 말고 떠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아이들에게도 좋은 교육이 되지 않겠습니까? 영혼의 자유는 내 자유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의 자유도 포함합니다. 우리 교회를 경험하신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우리 교회는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자유롭습니다. 들어올 때도 예의를 가지고 들어오셨듯이 나갈 때에도 예의를 갖추어 이 교회가 잘 되도록 축복하고 나가면 아마 본인과 교회 그리고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은혜가 될 것입니다. 목사는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하기에 오늘은 교회를 떠날 때의 예절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회를 떠날 때 그 사람의 됨됨이(성화의 정도)가 드러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 이 글은 이미 광고 시간에 몇 차례 말씀드린 것입니다. 앞으로 교회가 확장되면서 모든 성도들이 더욱 더 예의바르게 믿음 생활하기를 바라며 오늘은 문서로 남겼습니다.
2018-07-06 10:36:53 | 관리자
허덕준어르신의 수술이 잘 끝나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수술 후 회복을 위해, 중환자실에 계신데 얼굴이 밝으시고 의사도 수술이 잘 되셨다고 하네요. 참고로 지금은 혈소판이 부족해서 수혈받고 계십니다. 샬롬.
2018-07-03 18:50:17 | 장용철
안녕하세요? 지난주에 광고 드린 대로 허덕준 어르신(허광무 형제님 아버님)께서 교회 주차장에서 넘어져 왼쪽 대퇴부에 골절이 생겼습니다. 오늘 오후 1시 30분에 수술이 있으니 기도해 주시고 속히 완쾌되도록 늘 기도해 주십시오. 건축 헌금은 우리가 예상한 대로 잘 나왔다고 합니다. 10%정도 부족한데 시간이 지나면서 채워질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어려운 경제 여건에서도 협조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외부에서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참여는 못했지만 신실하게 예배 참석하며 기도로 도와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입당이 채 두 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가 보니 본당 천장이 다 열려 있고 이제는 정말로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음향 장비도 설치하고 이번에는 정면에 250인치 LED 스크린도 설치할 것입니다. 또한 미디어 사역을 위한 방도 꾸미고 여러 교육실 교제실도 꾸며서 말 그대로 지역 교회로서의 모든 기능을 감당할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 속에서 이 일이 이루어졌으면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고 그것이 현실이 되었기에 감히 하나님의 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서창동 캠퍼스에서 좋은 성품의 성도들이 모여서 아이들 교육하며 복음 선포와 선교 그리고 구제 등 기본적인 임무를 수행하려고 합니다. 집사, 지역 인도자 등 교회의 리더들과 열심히 일하는 분들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성도로서 마땅한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정생활(부부 관계)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해도 이것이 잘못되면 인생에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미디어 사역이 날로 확장되고 있는데 동시에 마귀의 방해도 심합니다. 또 우리의 미디어 선교 일을 폄하하는 사람들도 내외에 있습니다. 이왕이면 한마음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Total truth를 전합니다. 교회 밖에까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사회주의/낙태/동성애/종교통합 등의 좌익 사상을 배격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 민주주의/자유 시장 경제 체제를 지지하고 발전시키려 노력합니다. 이런 제도하에서만 복음 선포와 영혼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름철입니다. 남녀노소 모두 단정한 복장에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짧은 치마, 반바지 No!).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답게. http://www.cbck.org/bbs/board_m.html?board_table=qt&write_id=636 사랑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8-07-03 09:50:20 | 관리자
요즘 둘째애한테 배운게 있습니다. 마귀가 흔들어 놓으려 할때 '근데 어쩌라고'. 멈추면 포기할 것 같아서..그런 아슬아슬한 마음에서 이젠 강건해졌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분명 계신데, 그럼 다 가진 건데..저와 제 상황을 볼 시간에 한번 더 엄청나신 하나님을 볼 거예요~하루하루 성령님만 의지하며 열심히 알아가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2018-06-29 13:56:05 | 목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