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나라생각에 눈물로 기도드리다 잠들면서 리더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경험하는 하루하루입니다.오늘아침 갑자기 드는 우스운생각이-나라걱정은 이리 크면서 내본인 거룩한생활 이거하나 제대로 못하나싶은게..예수님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삶을 제대로 한번 살아보자 크게 결단했습니다~^^성령님의 인도-예수님 말씀에 복종-하나님께 영광 드려야지 다짐합니다. 아버지! 나라 살려주세요..
-오히려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갖 종류의 행실에 거룩할지니라.기록된바,내가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할지니라,하였느니라.-베드로전서1장15,16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https://youtu.be/ujftc4iXC7g?si=kKwV_YgPE5V6Qx5v
2026-05-03 07:54:29 | 목영주
악하고 약한 본성을 가졌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반복해서 죄를 저지른다는 자매님의 의견에 큰 공감이 됩니다. 오늘날 악한 시대에서도 당장 느껴지는 안락함에 종교의 자유의 가치를 잊고 조금씩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크리스천이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고 깨어나길 소망합니다.
2026-05-02 18:56:34 | 김지훈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한 주간도 평안하게 지내셨나요?
지난주 목사님의 설교는 신약교회사를 읽고 배우며 알게되는, 많은 역사적 사건 속을 관통하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자기 행위는 악하고 자기 형제의 행위는 의롭고 올바르기에 사악한 자가 참을수 없어서 죽였다는것, 그것은 모든 시대 순교자들의 원형이고 거짓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핍박하는것이 세상의 역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초대교회부터 침례교회가 세워지기까지의 모든 교회 역사속에 있는 고난과 박해가 왜 일어나는지 수긍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주는 챕터9. 영국 침례교의 탄생과 확산에 대해 살펴보고 나누었습니다.
● 영국 침례교의 탄생 및 확산 - 분리 주의에서 침례교로 (AD1534 - 1689)
- 16~17세기 영국 교회는 국왕이 머리인 전형적인 국가 교회 체제였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회심한 신자들의 자발적 교회, 신자침례, 정교분리,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는 침례교가 태어날수 있었을까?
- 이 장에서는 헨리8세의 종교 개혁과 1689년 관용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침례교의 원리를 통해 근대 자유주의 역사에 어떤 출발점을 남겼는지 살펴 보려한다.
● 헨리8세의 종교 개혁 - 권력의 이동, 복음의 회복은 아니었다
- 1534년 영국 왕을 '영국 교회의 유일한 최고 수장'으로 선언한 수장령이 통과되며 영국의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영국의 종교 개혁은 매우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신학적 개혁이 아니라 권력의 이동이었다.
(자매:수장령으로 종교 개혁이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카톨릭의 교리와 색채가 많이 남은 영국 교회에 한가지 변화는 영어로 번역된 틴데일 성경이 비치 된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수 있었던 이 작은 변화가 점진적으로 영국을 변화시킨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 국가 교회 체제의 문제점
- 헨리8세 이후, 에드워드 치하에서 영국 교회는 개신교의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후 왕위를 계승한 메리1세는 영국을 다시 로마 카톨릭으로 돌리려했다. 수백명이 순교 된 메리의 박해는 역효과를 낳고 '블러디 메리' 라는 오명을 얻었다. 메리 이후 등극한 엘리자베스는 중도적 절충을 추구했다. 그녀는 영국을 다시 개신교로 세우되 카톨릭 신자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수장령과 함께 통일령을 통과시켜 이 두법은 영국 국교회의 성격을 결정짓는 기초가 되었다.
(자매:지도자나 정권이 바뀔때마다 고난과 박해가 반복되는 역사를 바라보며, 사람은 본성이 악하기에 역사속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반복하여 악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것을 봅니다. 그럼에도 신약 교회역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 할때는 여전히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 국가 교회체제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고 결국, 성경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은 점점 더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국가 교회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들이 나중에 청교도 운동과 분리주의 운동, 그리고 결국 침례교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 청교도의 등장 - 안에서 개혁하려는 시도
-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안에 남아 있으면서 교회를 개혁하려 하였다. 그들이 원한것은 예배를 더 단순하게 만들고 개인적이고 경건한 삶을 강조했다. 그들은 교회를 개혁하고 싶어했지만 국왕과 의회등 국가가 통치하는 정치적 현실에 부딪히게 되었다.
● 분리주의 등장 - 밖으로 나가는 선택
-16세기말,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는 한 참된 계혁은 불가능하기에 성경에 따라 독립적인 회중을 세우는 분리주의자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청교도들과 많은 신학적 확신을 공유했지만 그들과 달리 국교회를 떠났다.
- 1593년 배로와 그린우드라는 두명의 분리주의 지도자가 런던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들의 죄목은 '여왕폐하의 권위를 부정하고 국교회를 비방하며 반란을 선동한 죄'였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은 성경에 따라 독립적인 교회를 세운것 뿐이었다.
● 존 스마이스 - 진리를 찾는 순례자
- 1600년경, 스마이스는 링컨시의 공식 설교자로 임명 되었는데 이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그는 성경을 강해하는 강력한 설교자로 알려졌으나 그의 설교는 점점 더 국교회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게 되었다. 1602년 해임된 후 분리주의 회중에 합류 했으며,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 하였다.
(자매:지금껏 종교 개혁을 하려고 노력한 사람들 대부분이 명석하고 많은 공부를 한 분들이네요. 존 위클리프, 루터, 칼빈, 얀 후스, 그리고 존 스마이어스등, 하나님께서 교회 역사의 흐름을 바꾸실때 쓰임을 받은 면면을 살펴보면서 한국의 선교 초기와 그 이후에도 바른 성경지식을 가진 목회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현재의 한국 교회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 스마이스는 메노나이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메노는 신자 침례의 성경적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했고 자발적 교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또 다른 근본적인 의문에 직면하며 참된 침례에 대한 정당성과 기원을 묻게 되었다.
- 1609년 신약교회 회복을 위해 성경적 원리로 돌아가야 함을 깨달은 스마이스는, 스스로 침례를 주는 '자기침례'를 시행한 후 즉시 회중의 다른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기 시작했다. 이것이 최초의 영국 침례 교회의 탄생이었다.
- 스마이스와 그의 회중의 신학은 일반 속죄 또는 보편 속죄를 주장하는 일반 침례교로 불리게 된다.
● 토마스 헬위스 - 영국 땅에 침례교를 세우다.
- 1612년초, 헬위스와 약 10~12명의 동료들이 영국으로 돌아왔다. 런던 외곽의 스피털필즈 지역에 정착해 자신의 집에서 작은 회중을 모았다. 이것이 영국 땅에 세워진 최초의 침례 교회였다.
- 1612년 헬위스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책을 출판했는데 제목은 [불법의 신비에 대한 짧은 선언]이었다. 이 책은 로마 카톨릭과 영국 국교회의 오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의 가장 혁명적인 부분은 양심의 자유에 대한 선언이었다. "왕은 영혼의 주인이 아니다"
(자매:헬위스는 탁월한 지도자였다는 것을 보며 진정한 리더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아니었어도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종교의 자유와 영혼의 자유를 위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 임에도 행동으로 보여주는 모습을 통해 리더의 본을 보여 준것 같습니다.)
- 헬위스의 대담한 선언은 결국 가혹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순교자였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정교 분리를 위해, 침례교의 원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 종교적 다양성의 확대
- 왕당파와 의회파의 충돌로 내전이 일어나 국교 체제가 약화되는 사회적 배경이 형성 되었다. 또한 종교적 다양성이 점차 허용되기 시작한 환경이 마련되었다. 의회파의 승리로 크롬웰이 집권하면서 그는 종교적 관용을 지지하며 양심에 따라 예배 할 자유를 허용했다.
- 1651년 일반 침례교는 '표준고백'이라는 신앙고백을 발표했다. 이 고백서는 삼위일체, 성육신, 속죄, 부활, 재림같은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들을 확증했다. 동시에 침례교의 독특한 원리들[신자 침례, 회중 정치, 정교 분리]을 명확하게 선언했다.
● 박해 속 성장
- 박해는 명목상의 신자들을 걸러냈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떠났다. 그러나 진정한 신자들은 남았는데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었다. 박해는 침례교의 핵심 원리를 확증했다. 정교 분리가 왜 중요한가? 바로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면 국가는 언제든지 진리를 억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매:허가없이 설교한 죄목으로 감옥에 갇힌 존 번연의 상황은 앞을 보지 못하는 딸과, 가족이 견뎌야하는 궁핍함이 감옥에서 겪는 고통보다 크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천로역정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쓸수 있었던것은 그가 구원의 확신 가운데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도 목적을 이루신다는것을 다시 한번 더 알게 됩니다)
- 1689년, 새 정부는 '관용법'을 통과 시켰는데 이 법은 삼위 일체를 믿는 모든 개신교도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했다. 사회적 차별은 여전히 있었지만 법적 박해는 끝났다.
● 결론 - 대서양을 향하여
- 17세기말, 영국 침례교의 원리들은 대서양을 건너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침례교는 특별한 역활을 하게된다. 침례교는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정교 분리를 주장했으며 양심의 자유를 옹호했다. 로저 윌리암스, 존 릴랜드, 아이작 백커스 같은 침례교 지도자들은 미국 헌법의 종교 조항 형성에 기여했다.
(자매:메이플라워호를 재현해 놓은것을 보았는데 그때 얼마나 열악한 환경이었을지 가늠할수 있었습니다.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온 신앙인들, 거저 주어지는것은 없고 늘 희생을 통해 이루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 된 씨앗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쳐 영국에 심어졌고 그것이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 거대한 나무로 자랐다. 소수의 신실함이 다수의 타협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침례교 역사는 권력이 아니라 원리의 승리이다.
2026-05-02 14:38:38 | 최성미
2026-05-01 10:24:58 | 정영희
2026-04-30 10:09:18 | 심동휘
2026-04-29 18:17:00 | 김순영
2026-04-29 12:27:20 | 고승훈
주님을 믿게 되는 것 자체가 주님의 은혜 입니다.
주님 자신이 진리이기에 좁은 문 일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다른 길이기에 세상이 싫어합니다.
우리는 선진들의 피로 치른 귀한 믿음을 잊지않아야 합니다.
우리 침례교회가 어떻게 명맥을 이어 왔는지 살펴보는 시간이네요.
2026-04-26 18:08:16 | 이수영
2026-04-25 23:46:09 | 조민수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들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5장 22절~24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https://youtu.be/H2UxI1GmNbw?si=7QbGS2YalNvHC-Rw
하나님은 계세요. 제가 죽는 그날까지 예수님만이 제삶의 주인이십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 나라..아버지가 지켜주시고 바르게 세워주세요..
2026-04-25 17:19:03 | 목영주
우리가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한다라는 말씀이 큰 울림이 됩니다. 편안한 환경에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초를 마련해 준 믿음의 선조들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우리 손에 들려 주신 완전한 성경 말씀으로 진리를 마음껏 알도록 해 주신 주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2026-04-25 15:11:42 | 김지훈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신약교회사를 지난주까지는 part 1, 챕터 7까지 공부하고 나누어 보았습니다.
최초의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 예루살렘에서 회심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작은 공동체였다. 사도행전 이후 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AD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가 공인되었고 AD380년 데살로니가 칙령으로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국가교회가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변하기 시작했다. 어거스틴에 의해 천주교 신학이 완성되며, 교회가 교회를 박해하는 시대로 접어 들었다. AD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후 정치, 교육, 행정등 모든 분야에 로마 카톨릭교회가 지배하게 되며 약 1,000년의 중세 암흑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소수임에도 박해를 견디며 이어져 왔다. 왈도파, 존 위클리프, 얀 후스등이 그들이다. 루터의 95개 논제로 촉발된 16세기 종교 개혁은 유럽의 어둠을 깨운 거대한 사건이다. 지난주까지 루터와 칼빈, 그리고 츠빙글리의 미완성된 개혁까지 알아 보았습니다. 이번주 부터는 part 2. '신약교회 회복 운동으로서의 침례교'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 챕터8. 스위스 재침례교회 - 신앙의 자유를 향한 여정의 출발
- 오직 성경을 외치던 개혁의 한 복판에서 왜 성경대로 믿고 교회를 세우려 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이단으로 정죄 되었는가? 왜 루터파와 츠빙글리에게 까지 박해를 받고 수장 되기까지 했는가? 이 장에서는 스위스 취리히 개혁의 중심에서 재침례교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리고 최초의 신자 침례와 슐라이트하임 신앙 고백이 어떤 핵심 원리들을 세웠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 개혁의 불길이 알프스를 넘다
- 1517년10월31일, 마르틴 루터의 95개 논제 게시이후 종교 개혁의 불길은 유럽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에 도달했는데, 이곳은 자치적인 국가들의 연합이었으며 교회 개혁은 시의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진행 될수 있었다. 재침례교 운동은 스위스 취리히 리마트강이 흐르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 울리히 츠빙글리 - 스위스의 개혁자
- 중세 교회에서 설교는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달랐다. 그는 성경 본문 자체를 깊이 파고 들었고 교회의 전통을 성경의 빛으로 검토했다. 그의 설교는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기 언어로 성경의 의미를 명확하게 듣게 되었다.
- 1522년 사순절 기간에 소시지를 먹는 사건이 벌어지며 큰 논쟁이 촉발되었고, 사순절 금식 규정에 대해 공개적 토론이 시작 되었다. 츠빙글리는 67개조 논제를 제시하여 카톨릭측을 반박하며 시의회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취리히 종교 개혁의 공식적 시작이었다.
● 젊은 급진파들 - "성경만으로 충분하다"
- 많은 젊은이들이 츠빙글리의 개혁에 열정적으로 동참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콘라트 그레벨, 펠릭스 만츠, 게오르그 블라우록 등이며 츠빙글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정기적으로 모여 초대 교회의 모습을 연구했으며 당시 교회와 비교하였다.
- 신약교회와 16세기 교회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침례는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에게 주어졌지만, 16세기에는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 주어졌다. 신약 교회는 국가와 독립적이었지만 당시의 교회는 국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츠빙글리는 점진적 개혁을 원했지만, 젊은 개혁자들은 성경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두 그룹간의 충돌은 불가피 해졌다.
(자매: 젊은 개혁자들과 츠빙글리의 충돌을 보며, 사도행전의 바울도 바나바와 의견이 달라서 충돌하고 각자의 길을 간 사례가 있듯이, 특히 이 때는 중세의 벽과 시대의 상황이 주는 어려움이 있었기에 이해되는 부분도 있는것 같습니다.)
● 유아 세례 논쟁 - 갈등의 폭발
- 갈등이 폭발한 지점은 유아 세례 문제였다. 이는 단순한 신학 논쟁이 아니었고 교회론, 국가론, 사회구조 전체와 연결된 이슈였다. 출생 등록이 시민권 부여였으며 사회 편입이었다. 더 나아가 유아 세례는 국가 교회 체제의 핵심이었다.
(자매: 유아 세례, 자동 시민권, 자동 교회 회원등을 읽으며 우리 교회의 회원 가입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40개 필수 설교를 듣고, 교회의 철학이나 교리를 바르게 알고, 받아 들인후 회원이 되는 절차는 신약 교회와 침례 교회가 추구하는 바른 모습이라고 생각 됩니다.)
- 논쟁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1524년 10월, 취리히 시의회는 유아 세례를 거부하는 자는 처벌 받는다는 경고를 하였다. 다음해 1월에는 그레벨, 만츠 그리고 반대론자들은 취리히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 명령은 결정의 순간을 만들었다. 시의회에 순종 할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결과를 감수 할것인가?
● 1525년 1월 21일 - 재침례교의 탄생
-'그때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하느니라' (행5:29)
- 블라우록은 믿음을 고백하는 성인으로서 성경대로 침례를 받기 원했다. 그레벨은 물 한 그릇을 가져와서 신앙을 고백하게 한 후, 머리에 물을 부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의 신앙 고백에 따라 아버지와 성령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침례를 줍니다. 그 순간부터 재침례교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신약 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역사적 결단이었다.
(자매: 재침례교가 탄생하던 그날 저녁,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것은 무엇인가? 질문하고 기도하던 모습을 읽으며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할 질문인것 같습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 두려운 마음으로 늘 자신을 점검 해야겠습니다.)
● 재침례교 신학과 실천 - 슐라이트 하임 신앙 고백
- 1527년 2월 24일, 스위스와 독일 국경 근처의 슐라이트 하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재침례교 지도자들의 모임이 열렸다. 이 모임에서 '슐라이트 하임' 신앙고백이 작성 되었는데 이는 재침례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초기 문서 중 하나이며, 후대 침례교 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 슐라이트 하임 신앙고백 제1조: 믿는 자 들에게 주어지는 침례. 제2조: 거룩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파문(출회). 제3조: 주의 만찬. 제4조: 세상으로 부터의 분리. 제5조: 목회자는 교회가 선택한다. 제6조: 칼, 즉 무력이나 폭력은 안된다. 제7조: 법정에서 맹세. 충성서약을 거부한다.
● 박해의 시작과 확산
- 1526년 11월, 슈파이어 제국 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는 재침례교에 관한 법이 통과되었다. 재침례를 받거나 주는 모든 자는 화형, 참수, 익사 또는 재판없는 처형이 그 법이었다. 1527년 1월 5일, 취리히 리마트 강변에서 펠릭스 만츠가 처형되면서 그는 재침례교 운동의 첫번째 순교자 중 한 명이 되었다.
- 1527년 5월, 슐라이트 하임 신앙 고백을 이끌었던 사틀러는 아내 마르가레타와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판결문에는 "그의 혀를 자르고 뜨거운 쇠로 몸을 일곱 번 지진 뒤 그를 불태워 재로 만들라"는 끔찍한 형벌이 기록되었다. 재침례교인들의 피는 유럽 곳곳에서 흘렀고 초기 재침례 운동은 혹독한 박해 속에서 확산 되어갔다.
● 뮌스터의 비극 - 재침례교의 오명
- 1534년부터 1535년까지 독일의 뮌스터 시에서는 일부 급진적인 재침례교도들이 도시를 장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뮌스터에서 벌어진 광신과 폭력은 오랫동안 재침례교 전체의 이미지를 훼손했고 '재침례교인'이라는 이름은 '위험한 과격파' 라는 의미로 오해되었다.
(자매: 수많은 평화로운 재침례 신자들이 아무 관련이 없음에도 오명으로 고통을 당하게 된것은, 마귀가 일하는 방식인것 같습니다. 미리 선점하여 조직적으로 방해하는것, 킹제임스성경 논란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마귀의 역사가 아닌가 합니다)
● 재침례교가 침례교에 남긴 유산
- 재침례교와 후대 침례교의 관계는 오랫동안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주제였다. 과연 직접적 조직적 연속성이 있는가? 아니면 영적, 신학적 계승 관계인가? 가장 정확한 이해는 이것이다. 재침례교가 남긴 후대의 열매라는 점에서 분명한 연속성이 있다. 그들이 박해속에서 피로 확증한 원리들을 침례교가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세계적 운동으로 성장 시킨것이다.
- 재침례교의 영향은 스위스에서 시작되어 영국으로,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 북미로 이어졌다. 로저 윌리암스는 재침례 전통에서 강조해 온 양심의 자유와 정교 분리의 원칙을 실천하며 로드 아일랜드를 세웠고,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후 이러한 원리는 미국 헌법 수정 조항 제1조에까지 반영되며 국가 체제의 기초가 되었다.
(자매: 미국의 헌법은 현대 사회 자유 민주주의 기틀이 되었는데, 그들의 자유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엿볼수 있는것 같아요. 무엇보다 종교의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 영혼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된 일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면 이루어질수 없는 일이었을것 같습니다)
● 결론 - 취리히의 유산과 오늘 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 1525년 1월 21일 저녁, 취리히의 한 작은 방에서 일어난 일은 세계사를 바꾸었다. 그날 밤 몇명의 젊은이들이 서로에게 침례를 주었을때 그들은 단순히 종교 의식을 거행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학적 혁명이며, 천년 이상 지속되어 온 교회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 오늘 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자 침례 - 이 모든것은 성경에 손종하려고 한 침례교 성도들의 고난의 유산이다. 그들의 원리가 우리의 정체성이며 침례교의 길이다. 이 길이 취리히에서 시작된 길이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이다.
2026-04-25 14:32:47 | 최성미
불완전했지만 종교 개혁의 기초를 놓은 선조들 덕분에 지금 믿음의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있는 그대로 믿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신약 교회를 지켜 나가기 위해 저 스스로도 노력하고자 다짐해 봅니다.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6-04-20 09:50:03 | 김지훈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하며 많은 사람이 그 댓가를 치루고 오늘에 이르렀어요.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으나 신약교회를 이어나가는 우리교회가 있어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수고해 주시는 자매님들도 참으로 귀합니다.
2026-04-19 21:29:52 | 이수영
<하나님계심에 확신이 있다면 내꺼를 내려놓아야하는건 당연한 것이다>육신의 연약함으로 잘안되어져서 그렇지,그것이 정답이라면 말씀에 순종하고자하는 결단의 시간은 제경험상 그 가치가 컸어요..그리고 거룩한 성도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오려면 말씀으로 계심을 자꾸 확인 기뻐해야 하는구나..하는것도 체감합니다. 저는 제가 나이가 들어 작은꽃들이 예쁜줄 알았는데 하나님계심을 깊이 알수록 성화될수록 자연이 눈물나게 곱다는걸 오늘 알았네요!(저처럼 헤매면서 더디게 성화과정 보내지 않게, 갓구원받은 젊은 성도분들을 위해 몇줄 적어봤습니다~^^)
-내 형제들아,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다 기쁨으로 여기라.너희 믿음의 단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오직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이것은 너희가 완전하고 완벽하여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야고보서1장2~4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6-04-19 16:00:25 | 목영주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한 주간도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으로 보내셨기를 바라겠습니다.
아름답게 피었던 벗꽃들이 어느덧 푸른 잎들을 내고 있습니다.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따가운 햇살에 저도 모르게 그늘로 피하면서 봄의 끝나감을 아쉬워 합니다. 시대와 국가의 상황이 우리의 혼을 짓누르는 때에도 계절과 꽃들을 통해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자매모임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온 몸을 통해 기뻐하며 함께 사진을 찍고 감사히 보냈습니다.
이번주 챕터는 7. 16세기 종교개혁(좋은시작, 미완의 개혁)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 서론 - 새벽이 밝아오다
-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 앞에는 한 장의 라틴어 문서가 게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논제였다. 그 문서는 유럽을 뒤흔드는 폭풍의 시작이었다.
- 이 장은 종교 개혁이 회복한 진리와 남겨 둔 한계를 함께 살피며, 루터와 칼빈, 츠빙글리의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교회론과 양심의 자유 문제에서 왜 끝까지 나아가지 못했는지 검토한다.
(자매: 우리는 개혁자들을 우상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읽으며, 지금도 말씀을 듣고 깨닫는것 까지만 해야겠습니다. 무조건적인 추종을 하다가도 모기같은 작은 문제마저 본인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걸려 넘어지는 모습들을 종종 보게 될때마다 안타깝습니다)
● 마르틴 루터(1483 - 1546) - 종교 개혁의 시작
- 1505년 7월 2일, 죽음의 공포에서 루터는 극적인 삶의 변화로 인해 수도사가 되었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루터를 괴롭혔다. 그는 이를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 이해했다. 1518년경 루터는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정죄하는 속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선물로 주심으로써 얻게 되는 '칭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매: 처음에 루터가 두려워했던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노력에 의해 얻는 의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는 '의'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씀들을 통해 얻는 이런 영적인 기쁨들을 놓치지 말고 늘 감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 95개의 논제는 로마 카톨릭과의 논쟁을 불러왔고 공개토론을 통해 교황의 무오성과 공의회의 권위가 절대적일수 없으며 그들도 오류를 범할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1521년 공식적 파문을 당하며 로마교회와 완전한 결별을 했다.
- "나는 성경과 분명한 이성에 의해 확신되지 않는 한,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습니다. 나는 교황들과 공의회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 보름스제국 의회에서의 이 답변으로 루터를 죽이라는 칙령이 내려졌지만 그럼에도 프리드리히 선 후제를 통해 구출하시고 보호하심으로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자매: 성경과 분명한 이성에 의한 확신을 말하는 루터의 고백처럼 여기서 말하는 확신은 교만이 아니고 우리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하기위한 근거가 됩니다. 성경에 대한 확신, 교회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루터는 단 11주만에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했다. 그는 시장에 가서 사람들의 말을 들었고 어린이들의 말을 관찰했다. 생동감있고 이해하기 쉽게 독일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했다. 1534년 독일어 루터 성경전서가 출판되었고 이는 독일어의 표준화를 이끌고 유럽 종교 개혁 확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루터의 유산은 대단히 복잡하다. 긍정적 측면에서는 복음을 회복하고 종교 개혁의 다섯 솔라로 신학을 정립하며,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부정적 측면은 교회론에서 중세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국가 교회와 유아 세례를 유지했으며 성경신자들을 이단으로 몰아 박해했다. 그는 정교 분리의 원칙을 확립하지 못했고 반 유대인 정책을 지지하였다. "무엇을 믿느냐?"는 개혁했지만 "교회란 무엇인가?" 는 전혀 개혁하지 못했다. 침례교는 루터가 시작한 일을 완성하려고 한다.
(자매: 루터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극적회심, 수도사, 성경연구등을 통해 시대와 교회의 문제를 깨닫고 95개 논제를 통해 종교 개혁의 시작을 열었습니다. 비록 개혁은 미완의 모습이어도 우리 침례교가 이어져 올수있는 근간을 만들었다고 생각되며, 현시대에도 누군가를 준비하고 계실것을 기대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 울리히 츠빙글리(1484 - 1531) - 스위스 개혁
- 츠빙글리는 루터와 거의 동시에 스위스에서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았고, 설교자가 되었을때는 전통적인 미사 본문 대신 마태복음부터 시작하여 성경을 순서대로 설교하며 복음의 순수성을 외쳤다.
- 1523년 1월, 취리히 시의회는 츠빙글리 편에 서며 개혁을 지지하였다. 취리히에서 성상들이 제거되고 미사가 폐지 되었다. 츠빙글리는 루터와 많은 공통점이 있었지만 주의 만찬에 대한 다른 견해로 인해, 루터와 개혁파로 개신교 진영의 분열을 가져왔다.
(자매: 주의 만찬에 대한 해석이라든지 약간의 의견 차이는 있었으나 동시대에 함께 종교 개혁 운동을 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고 의지가 되며, 영향을 끼쳤을것 같습니다.)
- 그의 신학은 개혁 교회 전통의 기초가 되었다. 예배에서 성경에 없는것은 모두 제거 하여, 단순함은 개혁 교회의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도 교회론에서는 중세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역시 국가 교회를 유지했고 유아 세례를 옹호 했으며, 재침례 성도들을 박해하여 재침례를 받거나 주는 자는 수장한다는 법을 통과시킨 시의회를 지지하였다.
● 존 칼빈(1509 - 1564) - 제네바의 개혁자
- 칼빈은 루터의 저작들을 읽었고 개신교 신학을 받아 들였으며 결국 로마 카톨릭과 결별했다. 26세때인 1536년 논리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설명한, 개혁 신학의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인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였다. 칼빈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했고 이것이 나중에 칼빈주의의 특징이 되었다.
(자매: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깨달은, 카톨릭의 부패와 교리에 저항하며 개혁한 그들도 사회적 환경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개인의 한계가 미완의 개혁으로 끝맺음 된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 칼빈은 제네바를 기독교 모범 도시로 만들려 했으며 교회와 시 정부가 협력하는 체제를 확립했다. 또한 교회규례, 당회 등을 조직화하여 엄격하게 개혁하려 했다.
- 칼빈 신학의 핵심은 다섯가지로 구분 될수 있는데 첫째,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했다. 둘째, 이중 예정론(구원, 유기)을 주장하여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셋째, 인간이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설명은 때때로 '인간의 부패가 곧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이다'라는 방식으로 오해 되곤 한다. 넷째, 그리스도께서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말한다. 다섯째, 경건한 삶을 강조하며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수 없음을 가르쳤다.
(자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너무 치우친 견해로 인해 전적타락, 전적무능력이란 교리 때문인지, 장로교회에 출석하며 교제 했던 성도들 중에는 사업이 잘 될때는 은혜로 여기다가도 안좋은 일이 생기면 교회에 충성하지 않아서 생기는 일로 여기곤 했어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믿지만 영혼의 자유가 없이 억매인 그분들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 결론 - 불완전한 개혁과 침례교의 부름
- 종교 개혁은 위대했지만 완전하지 않았다. 여전히 국가 교회를 유지했고 유아세례를 고수 했으며 이단을 박해하고 양심의 자유를 부정했다. 이들은 왜 더 나아가지 못했을까? 첫째는, 천년 이상 지속된 전통의 무게였다. 둘째, 당시 사회에서 교회와 국가를 분리 한다는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셋째, 정치적 필요성이었다. 넷째, 신학적 확신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성경적이라고 진정으로 믿었다.
- 루터가 문을 열었고 재침례 교인들이 그 문을 통해 나아갔고 침례교가 그 길을 걷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신약 교회의 완전한 회복이다. 성경 만을 따르고 그리스도 만을 높이고 은혜 만을 자랑하는 교회이다.
2026-04-18 15:47:45 | 최성미
평소에 안일하게 생각했던 신앙의 자유에 대한 가치, 우리가 편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 이런 소중한 것들을 지금 지키지 못한다면 자녀들은 너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텐데... 생각만으로도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신약 교회 역사를 바로 알고,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2026-04-12 21:35:29 | 김지훈
죽을때 제일 아쉽고 후회될 그것이 지금 제일 급한 일이다 라는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제경우는 말씀에 순종이 최우선이고 그다음 제자식들 말씀좋아하고 하나님염두해두며 열심히 살아가기를 같이 훈련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요즘 더 추가된것은 <피하고싶은 상황,사람들 따뜻하게 바라보기> 입니다.이것이 설령 핍박가운데 해야하는 것이어도 제 본인이 힘든것일뿐 진리에 굴복하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요. 또한 이정도의 깨우침을 겪지않으면 엄청 대강 살아갈 저를- 미리 알고계시는 하나님께 살짝 죄송했어요~^^
-내일 있을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너희 생명이 무엇이냐?그것은 곧 잠시 나타났다가 그 뒤에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니라.-야고보서 4장 14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26-04-12 08:15:02 | 목영주
항상 진리는 좁은 문이죠.
우리는 피의 역사, 생명의 희생 덕분에 존재하고
핍박은 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필수가 되네요.
믿음을 생명으로 지켜낸 믿음의 선진들의 귀한 업적을 모든 분들이알았으면 좋겠어요.
자매모임이 성장과 섬김의 모임이 되어 가기를 바래요.
2026-04-12 07:43:18 | 이수영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이번주는 자매모임 시작전에 목사님께서 올려주신 영상 중 (행12:4)의 '이스터'에 대해 잠깐 토론을 하였습니다. 다른 모든 성경에는 이스터가 유월절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3절에 무교절 기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유월절 다음날부터 7일간을 무교절로 지키기에 4절에 유월절로 번역하는것은 옳지 않음을 알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합법화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교도를 흡수하기 위해 이스터(이방여신이름)축제와 기독교의 부활절을 혼합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이것이 카톨릭교회의 오랜 전통이 되어 오늘날도 이스터데이가 부활절로 사용되지만 우리는 'Resurrection Day'(부활절)로 사용하는것이 옳겠습니다.
● 어둠속의 등불 - 선구자들의 등장
(AD1170 - 1415)
- 중세말 성경이 가려지고 복음이 왜곡된 깊은 어둠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를 내버려 두시지 않고 가장 타락한 순간, 가장 강력한 억압 속에서도 늘 자신의 증인들을 남겨두셨다. 종교개혁의 원리인 '오직성경, 오직믿음, 전 성도 제사장직'을 선포하며 복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 외침이 훗날 종교개혁과 침례교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이들은 어둠속에서 꺼지지 않는 등불들 이었다.
●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 : 어둠을 가른 최초의 빛
- 12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유럽 곳곳에서 용감한 사람들이 일어나 부패한 교회 체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나중에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로 불리게 된다. 이들이 없었다면 16세기 종교 개혁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최종권위이며, 교황권과 사제계급을 비판하고 단순하고 순수한 신약교회로 돌아 가기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로마카톨릭의 심장부에서 목숨을 걸고 진리를 외치며 이 모든것 때문에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 왈도파 - 알프스 산맥의 증인들
(AD 1170년 경부터)
- 프랑스 리옹의 부유한 상인인 피터 왈도는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을 목도 한후 "만약 내가 오늘 죽는다면 나는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마태복음19장21절의 부자청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대부분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단순한 옷을 입고 거리와 광장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자매: 왈도는 '마19:21'절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누구나 믿고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실행에 옮기는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큰 부자였던 그가 재산을 다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하는일에 전념하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말씀대로 실행하며 사는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합니다.)
- 왈도의 진정성과 열정이 사람들을 감동 시켰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왈도파의 특징은 첫째, 성경을 절대적 권위로 삼았다. 언제나 그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성경에 없는것들은 거부했다.(예:연옥, 면죄부, 화체설, 유품숭배등) 둘째, 일반 성도 설교를 실천했다. 교회는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사도행전의 빌립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예로 들었다. 셋째, 그들은 예배를 단순하게 드렸다. 예배의 중심은 성경낭독과 설교였다. 넷째, 교황청의 부패를 비판하며 교황의 권위를 부정했다. 다섯째, 경건한 삶을 강조하며, 그들의 삶이 그들의 설교를 증명했다.
(자매: 왈도파는 특히 교황청의 부패를 비판하였는데 이것은 성경을 탐구하고 연구하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판단할수 있었기 때문 입니다. 전에 출석하던 교회에서는 설교에 대한것이든, 성경에 대한 것이든, 질문 하는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던 중세시대의 모습을 읽으며 현대 교회안의 안타까운 모습도 생각해 봅니다.)
- 1184년 베로나 공의회에서 왈도파는 공식적으로 이단 정죄를 받으며 파문되었고 박해가 시작되었다. 특히 1655년 피에몬테의 부활절 학살은 여자와 아이들까지 죽이는 끔찍한 학살이었다. 수세기 동안 이어진 박해에도 그들은 살아남아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자를 파송하고 비밀리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자매: 베로나 공의회에서 이단 정죄를 받은 후 부터 왈도파 사냥, 색출, 밀고, 처형 이런 글 들을 읽으면서 느낀점은 이들의 모습이 오늘날의 공산주의 사회 모습을 보는것 같습니다. 카톨릭의 영이 무엇인지 느껴집니다.)
- 왈도파는 침례교와 놀라울 만큼 유사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핵심 원리들 특히 성경의 권위, 모든 성도의 제사장직, 단순한 교회에 대한 강조는 후에 침례교가 주장하게 될 원리들과 일치했다. 역사적 자료를 통해 직접적인 계승 관계를 입증 할 만한 충분한 근거는 없지만 종교 개혁 이전에 신약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려 했던 가장 중요한 운동 가운데 하나였다.
● 존 위클리프(1320 - 1384) - 영국의 '종교 개혁 새벽별'
- 14세기 영국교회의 부패는 절정에 달했다. 정통 카톨릭 신학자였던 위클리프는 성경 연구를 통해 교회의 가르침이 성경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성경만이 최종 권위라고 선언했다.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 라는 주장이 성경에 없기에 교황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 역시 지적하며 사제의 역활이 필요 없음을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참된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의 보이지 않는 공동체라고 결론을 지었다.
- 위클리프의 가장 위대하고 지속적인 공헌은 성경 번역이었다. 그는 일반 성도들이 자기 언어로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며 1382년경 신약 성경, 1388년경 구약 성경 까지 최초의 완전한 영어 성경을 번역하였다. 위클리프를 추종하던 롤라드도 그의 가르침대로 검소한 옷을 입고 광장이나 시장에서 영어성경을 읽어주고 암송하도록 가르쳤다. 그들은 카톨릭의 부패를 폭로하며 단순한 신앙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자매: 카톨릭 신학자로서 성경을 연구하며 성경과 다른 가르침을 비판했던 위클리프의 모습을 보며, 당시에도 많은 신학자들이 있었을텐데 깨닫는 자는 소수 였구나 하는것과, 그럼에도 신.구약을 모두 영어 성경으로 번역하며 하나님의 도구로 큰 쓰임을 받는것을 보며 적은 숫자여도 진리 안에서 있어야 함을 생각합니다.)
- 위클리프는 '종교 개혁의 새벽 별'로 불린다. 루터보다 150년 앞선 종교 개혁의 원리들을 발견했고 그는 성경이 일반 성도의 손에 들어 가야 한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이 원칙은 영국 종교 개혁의 토대가 되었다.
● 얀 후스 (c.1369 -1415) - 보헤미아의 순교자
- 보헤미아의 남부 가난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얀 후스는 명석한 두뇌로 프라하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명성있는 설교가 이자 개혁가였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책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위클리프의 많은 주장에 동의했다. 그의 저작들을 체코어로 번역하고 자신의 설교와 강단에서 가르쳤다.
- 특히 후스는 설교단에서 교황청의 부패와 사제들의 도덕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교황 요한23세가 면죄부를 파는것에 분노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우리 죄를 용서하셨는데 어떻게 종이 쪽지로 죄를 용서 할수있는지 돈으로 용서를 살수 있다는 것은 복음을 모독하는것"이라고 외쳤다. 얀 후스의 영향력이 커지자 교회는 위협을 느꼈다.
(자매: 중세말 교황청과 사제들의 부패는 재산 착취뿐만 아니라 도덕적 타락,음행으로 사생아가 많이 출생 하였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수녀원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것도 사회 공헌의 의미도 있지만, 이런 부패를 감추기 위해 라는것은 공공연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 1415년 7월 6일 공의회는 얀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는 세속 권력에 넘겨져 화형 당하게 되었는데, 화형 당하는 그날 후스의 머리에는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후스의 순교 소식이 전해 지자 백성들은 분노하며 후스파 운동이 폭발적으로 보헤미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후스는 민족 영웅으로, 순교자로, 진리의 증인으로 기억되었다.
(자매: 우리 시대에도 언제든 교회를 박해하는 깊은 어둠의 때가 올 수 있음을 생각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며, 우리도 미리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것, 다음 세대인 자녀들을 믿음 안에서 바르게 양육 하는것, 그리고 핍박을 견딜수 있는 믿음을 위해 늘 기도로 준비해야겠습니다.)
● 결론 - 선구자들의 공통된 메세지와 침례교와의 연결
- 왈도파, 롤라드, 후스파, 그리고 침례교는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신약 성경이다. 그들은 모두 신약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려 했고 모두 초대 교회의 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래서 비록 서로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어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 선구자들이 없었다면 16세기 종교 개혁도 불가능 했을것이다. 그들이 뿌린 씨앗이 종교 개혁의 열매를 맺게 했다. 진리는 결코 소멸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시대에도 당신의 증인들을 남겨 두시며,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증인들을 가지고 계신다.
2026-04-11 17:30:03 | 최성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