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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금합니다.조회수 : 7310
    • 작성자 : 박무령
    • 작성일 : 2013년 11월 6일 21시 36분 2초
  • 안녕하세요. 이화영 목사님께서 쓰신 글인데요. 여러분들은 이 분의 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가?
     
     
    필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깨달은 바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성경 기자들이 구원이란 단어를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한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구원’이란 단어를 명사는 주로 ‘소테리아(swthriva)’를 사용했고, 동사는 주로 ‘소조(swv/zw)’를 사용했다. 이것이 잘 나타난 구절이 사도행전 12절이다.
     
    (행 4:12)다른 이로써는 구원(소테리아)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소조)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성경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성경 기자들이 ‘소테리아’와 ‘소조’를 다양하게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1) 성경 기자들은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을 표현할 때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행 16:31)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소조)을 받으리라 하고
     
    본문에 사용된 ‘구원’이란 단어는 ‘영혼구원’을 의미한다. 본문은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성경 기자들은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을 표현할 때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2) 신약성경 기자들은 신자의 육체가 죽을 때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도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딤후 4:18)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소조)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본문은 바울 사도의 말이다. 그는 예수님을 믿을 때 영원히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생명(영생)을 얻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는 “주님이 나를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이라고 했다. 이것을 볼 때 본문의 구원이 그의 육체가 죽을 때 그의 영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3) 신약성경 기자들은 신자의 육체가 부활해서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것에도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히 9:28)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소테리아)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중생한 신자들의 육체를 부활시켜서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했다.
     
     
    4) 신약성경 기자들은 ‘땅에서 복을 받는 것’을 표현할 때도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행 27:43)백부장이 바울을 구원(소조)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본문은 바울 사도가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서 배를 타고 로마로 끌려가던 중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그 때 큰 풍랑으로 인해서 배가 침몰하게 되었다. 로마군인들은 죄수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죄수들을 모두 죽이자”고 백부장(지휘관)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 사도를 살리기 위해서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헤엄을 쳐서 육지에 상륙하라”고 명령했다. 성경은 이것을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부하들이 죄수들을 살해하려는 뜻을 막았다”고 표현했다. 본문에 사용된 ‘구원’이란 단어가 사람의 영을 구원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소조(swv/zw)’다.
    바울 사도는 오래 전에 예수님을 믿어서 영의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또한 불신자인 백부장에게는 바울 사도의 영을 구원할 능력이 전혀 없다. 사람의 영을 구원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 따라서 본문의 구원이 바울 사도의 육체를 구원해주는 것(목숨을 구원해주는 것-육체가 복을 받는 것)을 뜻하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은 죽을 목숨이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에 소개한 성경말씀에 기록된 ‘구원’도 ‘육체가 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행 27:20)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소조)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행 27:30-31)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소조)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행 27:33-34)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 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소테리아)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디럭스바이블 성경사전은 성경의 구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구원: 하나님의 은혜, 또는 그 긍휼하심에 의해 사단의 세력과 죄로 인한 멸망에서 구해내는 일. 성서 중에도 종교적 의미가 아니고, 재해, 불행, 외적(外敵)등에서의 구원의 용례(用例)를 보게 된다(히 11:7, 시 34:6, 출 14:13, 신 20:4, 눅 1:71, 행 7:25). 또한 신약에는 병에서 ‘고침을 받는다’는 표현을 ‘구원되었다’는 의미의 말로 쓴 경우도 있다(마 9:22, 약 5:15, 막 6:56).”
     
    디럭스바이블 성경사전은 ‘죄에서 영을 건져주는 구원’과 ‘재해와 질병과 외적으로부터 육체를 건져주는 구원’만 소개했다. 하지만 성경 기자들은 ‘구원’이란 단어를 또 다른 경우에도 사용했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만 성경의 구원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다!
     
     
    5) 신약성경 기자들은 ‘하늘에서 상을 받는 것’을 표현할 때도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신약성경 기자들이 ‘하늘에서 상을 받는 것’을 구원으로 표현한 것을 깨닫는 것이 성경의 구원을 바르게 깨닫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초대교회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것을 깨닫지 못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위구원론을 주장했다. 그 결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도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하늘에서 상을 받는 것’을 ‘구원’으로 표현한 서신서는 야고보서, 빌립보서, 히브리서, 베드로서 등이다. 하지만 본 장에서는 지면 관계상 야고보서를 통해서 ‘하늘에서 상을 받는 것’을 ‘구원’으로 표현한 사실만 확인하도록 하겠다.
     
    (약 2: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소조)하겠느냐
     
    지난 2천여 년 동안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본문의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을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영의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런 까닭에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야고보서를 근거로 기세 좋게 “중생한 신자도 큰 죄(혹은 많은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반면 은혜구원을 믿는 신자들은 야고보서 때문에 큰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신부가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한 것은 유명하다. 권연경 교수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신부가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잘 알려진 대로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르며 신약의 일부로 인정하기를 주저했다. 야고보서는 신약의 다른 책들과 비교해 볼 때, 복음적 특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야고보서의 칭의론이 바울의 칭의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생각하며 그는 ‘어느 누구라도 이 두 사람의 가르침을 조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내 박사모를 그에게 씌워주고, 그가 나를 바보라 부를 수 있게 해 주겠다’라고 했다.”
     
    개혁파 신학자 켄달 박사는 그의 저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하다]에서 마르틴 루터 신부가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루터는 기껏해야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간주하였고, 그가 죽기 불과 1, 2년 전에는 ‘비텐베르그대학에서 야고보서를 가르치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하던 대부분의 은혜구원론자들은 “야고보서는 진짜 신자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도리를 가르친 말씀”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랜드종합주석은 야고보서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야고보서는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기 위하여서는 믿음뿐 아니라, 행위도 있어야 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 외에 인간의 행위가 덧붙여져야 한다는 신인협동(神人協同) 구원설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야고보는 다만 진실된 믿음에는 행함이 수반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도 야고보서 2장 14절을 바르게 깨닫기 전까지는 야고보서 2장 14절이 말하는 구원이 영혼구원인 줄 알았다. 이 때문에 필자는 본서를 집필하며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증언했는데, 어째서 야고보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증언한 것일까?’
     
    필자는 오랫동안 이 숙제를 풀지 못해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나님이 갑자기 야고보서 1장 25절이 생각나게 해 주셨다!
     
    (약 1:25)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필자는 즉시 야고보서를 펴서 본문의 문맥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야고보서가 말하는 구원은 영혼구원이 아니었다! 필자는 즉시 빌립보서 2장 12절의 문맥도 살폈다. 그 본문 역시 영혼구원에 관한 설명이 아니었다! 내친김에 히브리서 6장 4-8절의 문맥도 살폈다. 그 본문 역시 영혼구원에 관한 설명이 아니었다! 크게 놀란 필자는 오랫동안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구원’은 ‘복과 상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부터 이에 관한 성경의 증거를 소개하겠다.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구원’이 ‘복과 상을 받는 것’을 뜻하는 첫 번째 증거는 야고보서 1장에 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 선생은 시험을 당하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해서(율법을 잘 지켜서) 생명의 면류관(상)을 받게 하고, 복을 받게 하려고 야고보서를 기록했다.
     
    (약 1: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상-필자 주)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약 1:25)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본문의 ‘자유롭게’란 단어는 ‘엘류데리아(ejleuqeriva)’다. 디럭스바이블 헬라어사전은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엘류데리아: (합법적이거나 방탕한, 주로 도덕적으로 혹은 의례적으로) ‘자유’. <고전 10:29> 여명. liberty; 1)구원과 관계없는 것을 하거나 안 해도 되는 자유. 2)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할 자유, 권리. 3)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사는 자유, 진정한 자유.”
     
    이 해석을 볼 때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신자가 영혼구원을 받기 위해서 강제로(반드시) 지켜야 하는 율법’을 의미하지 않고, ‘신자가 복과 상을 받기 위해서 자원해서 지켜야 하는 율법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야고보 선생은 야고보서 1장에 이어 야고보서 2장에서도 신자가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을 강조했다.
     
    (약 2:8-9)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약 2:12-14)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소조)하겠느냐
     
    본문의 문맥을 볼 때 본문의 ‘행함’은 ‘율법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본문은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명백하다. 이런 문맥을 볼 때 야고보 선생이 야고보서 1장에서 말한 “율법을 지켜야 상을 받고,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는 주장(약 1:12, 25)을 야고보서 2장에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바꿔 말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 선생이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 “율법을 지켜야 상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번거롭기 때문에 두 말을 줄여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기자들이 ‘구원’이란 단어를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으므로 야고보 선생의 표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불행하게도 초대교회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야고보서 2장 14절의 구원을 영의 구원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성도들이 지옥의 공포에 시달린 것이다!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구원’이 ‘복이나 상을 받는 것’을 뜻하는 두 번째 증거는 야고보가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로 들어서 구원을 설명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아브라함부터 보자.
     
    (약 2: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바친 사건을 근거로 “신자는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구원(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증언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신자도 아브라함처럼 살아야 천국에 간다”고 주장하거나, “아브라함처럼 사는 신자만 진짜 신자”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들이 명백한 오류인 것은 창세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창 22:16-17)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들을 바쳐서 영혼구원을 받았는가? 전혀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 아들을 바쳐서 큰 복을 받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바쳐서 큰 복만 받았겠는가? 당연히 하늘의 상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충성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큰 상을 주셨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가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은 사람의 예로 아브라함을 든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의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복과 상을 받는다’는 뜻인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은 것을 예로 든 후에 라합이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은 사실을 예로 들었다.
     
    (약 2: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합이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주어서 큰 복을 받은 것은 여호수아서와 다른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그 일을 해서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구하는 복과 유다지파의 살몬과 결혼해서 보아스를 낳는 복과 다윗왕의 고조모가 되는 복을 받았다.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주어서 큰 복만 받았겠는가? 그녀 역시 아브라함처럼 큰 상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가 라합을 예로 들어서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는 진리를 가르친 것이다! 다만 야고보가 “라합은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았다”는 말을 줄여서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표현했을 뿐이다! 그 당시의 성경 기자들이 ‘구원’이란 단어와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을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에 야고보의 표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야고보서 2장이 말하는 ‘구원’이 ‘복이나 상을 받는 것’을 뜻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히브리서 11장에 있다.
     
    (히 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충성한 사람은 반드시 상을 받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충성해서 상을 받은 사람들의 예를 들어달라”고 질문할 수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충성한 사람들을 예로 들어서 하나님께 충성하면 상을 받는 진리를 설명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의 내용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충성해서 상을 받은 신자들의 대표자는 모세일 것이다.
     
    (히 11:24-26)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모세는 하나님이 상을 주시는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처럼 큰 고난을 감수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신약시대의 신자들도 모세처럼 하나님께 충성해서 상을 받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런 목적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노아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를 받아서 방주를 지을 수 있었다”고 했고(히 11:7), “아브라함은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고향을 떠날 수 있었다”고 했다(히 11:8-10). 이렇게 믿음의 위인들이 상 주심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충성한 사실을 소개하던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히 11: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이 말은 ‘아브라함도 모세처럼 상 주심을 바라보며 외아들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서 상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충성하면 상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히브리서 기자와 야고보서 기자가 동일하게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서 복을 받은 사건을 근거로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율법을 지켜서) 복과 상을 받는다”고 증언했다. 다만 야고보서 기자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율법을 지켜서) 복과 상을 받는 것을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고 표현한 것이 다를 뿐이다.
     
    한편 야고보서 기자와 히브리서 기자는 동일하게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던 라합도 행함으로 상을 받은 신자의 표본으로 소개했다.
     
    (약 2: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히 11:31)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처럼 히브리서 기자와 야고보서 기자가 동일하게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로 들어서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복과 상을 받는다”고 증언했다. 다만 야고보서 기자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복과 상을 받는 것을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의롭게 된다)”고 표현한 것이 다를 뿐이다!
     
    아브라함과 라합은 언제 영혼구원을 받았을까? 이것도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먼저 아브라함부터 보자.
     
    (창 15:3-6)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하나님을 믿어서(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일(영혼구원을 받은 일)을 기록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영혼구원을 받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롬 4:2-3)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이처럼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동일하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영혼구원을 받은 것과 그가 행함으로 복과 상을 받은 것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증언한다.
     
    라합은 언제 영혼구원을 받았을까? 여호수아서는 라합이 영혼구원을 받은 시점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수 2: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스라엘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어서 영혼구원을 받았다. 이 때의 라합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었다. 이처럼 라합도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영혼구원을 받았다!
     
    야고보서 2장 22절의 ‘믿음이 아브라함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창세기 본문의 뜻을 쉽게 알 수 있다.
     
    (창 22:12)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삭을 바치기 전에도 하나님을 경외했다. 하지만 이삭을 바치기 전에는 하나님이 인정할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했다. 자기의 목숨보다 더 아끼는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에게 큰 복과 큰 상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을 인정해 주셨다. 야고보는 이것을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성결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성기호 박사는 필자의 야고보서 해석을 읽은 후에 메일로 다음과 같은 평을 보내주었다.
     
    “이화영 목사님께. 믿음과 행위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셨군요. 구원이란 의미가 다양함도 잘 지적하셨고요.”
     
    어떤 목회자는 다음과 같은 독후감을 보내주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방금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정말 구원에 관한 독보적인 해석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기도하시고, 몸부림쳐서 받아낸 명쾌한 말씀입니다. 영혼구원과 복과 상급에 대한 구원을 발견하신 목사님은 행복자십니다.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했던 루터가 목사님을 만나셨다면 아마도 큰 절을 하셨을 것입니다.”
     
    필자의 책을 호평해 준 성기호 박사를 비롯한 여러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진심으로 사의를 표한다.
     
    성경에 해박한 신자들은 필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의 구원론 난해구절들을 바르게 해석한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잘 모르지만 교단의 교리를 맹신하지 않는 신자들은 베뢰아 사람들처럼 지혜롭게 처신할 것이다.
     
    (행 17:11-12)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부언
    야고보서의 본뜻을 깨달은 것으로 판단하는 필자는 오랫동안 야고보서 때문에 고민한 마르틴 루터 신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오죽 답답했으면 “나에게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조화시켜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내 박사모자를 씌워주고 ‘나를 바보라고 부르라’고 하겠다”고 약속했겠는가? 모르긴 해도 마르틴 루터 신부가 필자의 야고보서 해석을 가장 기뻐할 것으로 사료된다. 이 때문에 필자는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뵌 후에 가장 먼저 마르틴 루터 신부를 만나보고 싶다.
     
     
    *에피소드
    필자가 본서의 초판을 출판하자, 필자가 소속한 노회원들 중의 일부가 필자의 책에 이의를 제기했다. 필자가 400년이 넘도록 진리로 믿어져 온 칼빈주의 구원론을 개혁했고, 그 때까지는 필자의 구원론이 충분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그들 중의 강경파들이 필자와 함께 진지하게 성경의 구원을 연구하기를 거부하고, 무조건 필자에게 필자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한 점이었다. 그들은 “우리는 교수님의 평가를 믿는다”고 주장하며 필자의 주장을 무조건 묵살했다.
    새로운 사상이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가장 먼저 배척을 받는 현상에 관해서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마 13:57) 천명하셨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로운 운동은 무엇이든 가장 가까운 사람들한테서 맨 먼저 반발을 받게 되는 법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은 그들이 소속한 천주교회에게서 가장 먼저 배척을 받았고, 예수님의 사상은 주님과 한 민족인 유대인들에게서 가장 먼저 배척을 받았다. 이처럼 필자의 구원론은 필자가 소속한 노회원들에게서 가장 먼저 배척을 받았다!
    필자는 필자의 문제를 처리할 권한을 위임받은 노회원들에게 “부실한 초판을 회수하고, 교단신문에 사과광고를 내겠지만 초판을 보완한 증보판은 철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필자가 계속 그런 입장을 고수하자, 연구위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라도 하라”고 했다. 그리하여 필자는 초판을 회수해서 처분하고, 교단신문에 사과광고를 게재했다. 하지만 얼마 못되어서 노회원들은 필자의 증보된 책이 인터넷 서점에 보급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경파들을 또다시 필자에게 그 책의 철회를 요구했다. 반면 온건파들은 필자에게 “양보할 것”을 간청했다.
    어느 날 노회가 열렸다. 그러자 필자의 책 문제로 인해서 회의가 몇 시간동안 공전되었다. 필자를 아끼는 목회자들과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장로는 필자에게 양보할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이에 부담을 느낀 필자는 마음이 약해져서 “나의 주장을 철회하겠다”고 선언했다. 노회원들은 박수로 환영했다. 그렇게 해서 노회가 끝났다. 필자는 매우 섭섭했지만, 그 때 모든 일이 마무리 된 줄 알았다!
    하지만 필자가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제가 터졌다. 필자와 함께 오던 어떤 목회자가 휴게소에서 필자에게 음료수를 사 주었는데, 그 음료수를 마신 후에 필자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약 20분 후에 필자의 얼굴은 E. T처럼 변했고, 온몸이 축 늘어졌고, 두 눈이 완전히 실명되었다. 큰 충격을 받은 필자는 즉시 필자의 죄를 회개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깨닫게 해 주신 진리를 부인한 죄를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금방 죽거나, 최소한 불구자가 될 것 같던 필자의 몸이 불과 1-2분 안에 정상이 되었다!
    하지만 믿음이 작은 필자는 그 후에 제비뽑기로 한 번 더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다. 아내와 함께 ‘주장철회’, ‘계속주장’을 적은 종이를 봉투에 넣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제비를 뽑았다. 한 번 뽑았는데 ‘계속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기드온의 양털 시험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제비를 뽑았다. 그래도 ‘계속주장’이 나왔다. 그 때부터 필자는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고, 교단에서 쫓겨나는 일을 당하면서도 지금까지 줄기차게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신 구원론을 전파하고 있다!
    필자가 애정을 가지고 섬기던 교단에서 쫓겨날 때 필자에게는 필자를 쫓아낸 목회자들에 대한 분노가 충만했다. 머리로는 그들을 용서해야 할 것을 아는데도 마음은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교단에서 쫓겨난 필자를 양촌치유센터로 인도해 주셨다. 필자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 내적치유와 축사사역을 받았다. 그 때 필자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받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았고, 필자 속에 들어있던 악한 영들을 추방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필자를 쫓아낸 목회자들에 대한 분노가 사라져 버렸다. 진심으로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고, 진정으로 그들을 축복할 수 있었다. 그 때부터 필자 부부는 양촌치유센터의 치영원에서 내적치유사역과 축사사역을 공부했다. 양촌치유센터의 원장인 김종주 박사는 필자 부부를 양촌치유센터의 전인치유사역자로 세워주었다.
    마음의 상처와 악령들 때문에 고생하는 내담자들을 치유하는 일은 필자 부부에게 전에 맞볼 수 없었던 커다란 보람을 안겨주고 있다. 몇 년, 마음의 상처와 악령들 때문에 혹은 몇 십 년 동안 지옥 같은 생활을 하던 내담자들이 2박 3일 간의 전인치유를 받은 후에 천국을 누리는 것을 보는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황송하게도 어떤 내담자들은 필자에게 큰 절을 하기도 하고, 필자를 ‘생명의 은인’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어느 날 필자는 라이프신학교 총장인 예영수 박사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 때 필자는 예 박사에게 필자의 저서 [이것이 구원이다]를 선물했다. 며칠 후에 예 박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책을 아주 잘 썼다”고 칭찬하며 “목사님이 쓴 다른 책들도 보내 달라”고 했다.
    집에 돌아온 필자는 예 박사에게 필자의 다른 저서들을 보냈다.
    몇 주 후에 예영수 박사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이것이 구원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책들도 아주 잘 썼다”고 칭찬하며 “꼭 한 번 만나자”고 했다.
    몇 주 후에 필자는 예영수 박사를 찾아갔다. 그는 또 다시 책에 관한 칭찬을 한 후에 “도대체 어떤 교단에서 그렇게 잘 쓴 책들을 문제 삼아서 목사님을 쫓아냈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필자가 초판을 부실하게 써서 오해가 발생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설명했다. 예 박사는 “이 책을 학위논문으로 발표하면 아무도 시비를 걸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예영수 박사와 그가 대표회장으로 있는 교단(사단법인 국제교회선교연합회-독립교회연합회)의 임원들은 필자를 그 교단의 목사로 받아주었다. 이에 필자는 지면을 빌어서 필자의 책을 인정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필자를 목사로 인정해 준 예영수 박사와 교단의 임원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필자는 현재 양촌치유센터에서 전인치유 강의와 전인치유사역을 감당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설교와 강의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필자의 기도제목 중의 하나는 본서를 전국의 서점에 보급하는 날이 오는 것과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본서를 강의하는 날이 오는 것이다. 본서에 공감하는 독자들의 기도후원을 부탁하는 바이다.
     
    혹시라도 필자를 교단에서 축출한 목회자들 중에서 그 일을 후회하는 이들이 있다면(그런 목회자가 있는 것을 간접적으로 들었다) 필자는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했던 말을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창 45:5)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어느 날 필자는 유투브에서 온 몸에 55%이상에 3도 화상을 입어서 몸과 얼굴이 크게 상한 이지선 자매의 간증 동영상을 보았다. 그 때 그 자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만일 당신이 예전의 얼굴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저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이 믿기 어렵겠지만, 제가 그 때로 돌아가면 지금처럼 수많은 어려운 분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고, 지금처럼 행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필자는 필자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옛날에 목회할 때로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겠는가?”
    예전에 필자가 자립하는 교회에서 훌륭한 성도들과 함께 재미있게 목회를 했기 때문에 그 때로 돌아갈 마음이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 필자의 절대적인 마음은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 때로 돌아가면 지금처럼 기쁘고 보람되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은 물론, 지금보다도 훨씬 더 무능한 종으로 일생을 끝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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