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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들의 대통령 이야기 ‘정희’를 읽고조회수 : 28
    • 작성자 : 손혜선
    • 작성일 : 2026년 11월 3일 19시 39분 38초
  • 우리들의 대통령 이야기 ‘정희’를 읽고

    날이 갈수록 나라의 안보가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과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들을 때마다 비록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힘도 없는 국민이지만 나부터 깨어나고 위기 상황을 알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따라서 그와 관련된 책이 나왔다고 들으면 바로 주문해서 읽으며 과거의 일과 현재의 일어나는 일들을 매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우리들의 대통령 이야기 ‘정희’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점에서 바로 구매했다.

    그날 저녁 조금 읽는데 짤막하게 이야기하듯 쓰여 있어서 이해하기도 대체로 쉬웠고 다음 날이 개천절 대체 휴무라 부담 없이 책상 앞에 앉아 읽어 나갈 수가 있었다.

     

    p26 - 통일벼, 유신벼 등 종자 개량으로 1976년 쌀을 자급자족하는 ‘농업혁명’ 전까지는 식량이 모자라 쌀 막걸리 제조를 금지했다.

     

    p39 – 국민에게 배불리 밥을 먹이기 위해 콩나물국과 김치를 안주로 동동주를 마셔가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기필코 성공시켜 이 나라에서 가난을 몰아내야 한다고 의기투합했다.

     

    읽기 시작하여 몇 페이지 못 가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책 속의 내용이 나의 어릴 적 기억과 겹쳐지며 지금의 시대에서 거슬러 60년대와 70년대 초의 우리 집 환경을 환히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은 그 시대 중에서도 더 가난하였던 거 같았다. 땅이 없어 남의 집에서 일해서 돈을 벌어 단칸방에서 부모님과 5남매가 살았다. 엄마께서 가끔 이웃에 가서 쌀 한 되를 빌려오셔서 밥을 하시는 모습이 생각났고 어느 해 가을에는 금방 베어낸 볏단을 리어카로 실어 와서 훑던 모습도 떠올랐다.

    그 당시 호롱불 밑에서 살다가 어느 해에 전기는 들어왔으나 110볼트에 30촉짜리 전구 한 개로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살던 때였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밤늦게까지 나락을 훑던 모습도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약간 붉은 색이 나는 30촉 자리 전구가 어느 해에는 60촉으로 바뀌었고 어느 해부터 형광등이 들어왔는데 온 방이 환~하게 보였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러면서 논이 없는데 벼가 어디서 났을까? 생각해보면 아마 노는 빈 땅에 벼를 심었다가 베어온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많이 굶으셨던 엄마는 위장병으로 평생 고생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어떻게든 밥은 굶기지 않으셨던 게 아니었을까?

    초등학교 갈 때면 논과 연근 밭 사잇길을 걸어갔다, ( 그 연근은 전량 일본으로 수출된다 했다.) 그 논에는 여름과 가을이면 어린 우리 키와 비슷한 키가 큰 벼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어느 해부터 키가 작은 벼들이 자라고 있었다. 몇 년 지나서 쌀 걱정 없이 밥 먹을 수 있었고 그 키 작은 벼가 쌀 수확량이 많은 통일벼였단 걸 나중에 알았다. 그런데 그 통일벼 정책이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루어낸 정책 덕분이란 걸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면서 고마움과 함께 그때의 어려웠던 많은 기억이 떠오르면서 또다시 눈물이 나기 시작하였다. 쌀 부족이던 나라와 국민을 위해 애쓰시던 내용이 내 가슴을 울렸다. 어린 시절 기억이 겹치면서 가슴이 먹먹해지며 지금 이렇게 풍요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p36~37 - 포항제철은 박정희가 명운을 걸고 건설한 고속도로보다 세배나 더 많은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국가 대역사였다. (중략) 육군 사관학교 제자 박태준을 신뢰했다. 516 혁명이 성공하자 박정희는 박태준을 불러 국영 기업체인 대한중석으로 보내었고, 거기서 만년 적자 기업 대한중석을 흑자로 돌려놓자 큰 도박이나 다름없는 포항제철 건설을 그에게 맡기기로 했다. -중략- “나는 고속도로를 직접 감독할 터이니 임자는 제철소를 맡아주게. 고속도로가 뚫리고 제철소가 준공되면 우리가 바라던 공업 국가의 꿈이 실현되는 거야.”

     

    포항 제철하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결혼 후 포항에서 몇 년 살았었다. 주인집 아들이 신혼으로 포항제철에 다니고 있었는데 꽃이 핀 마당에서 노는 우리 꼬마 아들의 사진을 찍어갔다. 사내 사진대회에서 1등 하여 사내에 걸어놓았다고 자랑하시던 일화다. 포항제철이 국가기업이라 그 주변에서는 모두 그 회사에 입사하기를 열망한다고 들었다. 그런 포항제철을 박정희 대통령께서 생각하시고 지시하셔서 엄청난 난관을 이기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철강산업을 이룩하고 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그 기원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목숨 걸고 해내신 박태준 사장님 이야기도 이 책과 유튜브를 통해 알게 되면서 그분께도 감사를 가지게 되었다.

     

    (이 책 내용은 아니지만, 포항제철이 생길 때에 돈이 모자라 위기에 처했을 때 박태준 회장과 박정희 대통령께서 결단한 이야기를 들은 대로 잠시 소개해 보려 한다.

    포항제철 건설 도중 자금난에 부딪혔다. 박태준 회장은 차관협조 요청을 위해 직접 미국 피츠버그로 떠났다. 그러나 사실상 여러 가지 이유로 끝이 난 상태였다. 이유는 ‘그렇게 큰 규모의 제철소가 빠른기일에 완공되면 다른 나라 기존 제철소의 지위와 확장 계획에 위협적인 요소로 등장할 수 있으며 세계 철강 시장의 가격 구조에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박태준은 다시 한국으로 오는 도중 하와이에 들렀다. 그곳에서 하와이 거주 일본인을 보고 생각이 떠올랐다. 그 당시 대일 청구권 자금을 들여오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었다. 1966년부터 1975년 사이에 그 돈을 써야 했다. 그 당시가 69년 도쯤이었다. 박태준은 생각하기를 “반은 썼고 반은 남아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남은 대일 청구권 배상금이 1억 정도는 남아 있을 거였다. 대일 청구권 배상금은 일제 식민지 배상에 대한 돈이었다. 그 돈은 농림수산 부문에 쓰기로 일본과 합의가 끝난 상태였다. 그런데도 산업용 프로젝트에 사용하자고 청구를 했다. 일본은 ‘한국 스스로 철강을 생산해서 그걸 가지고 한국이 여러 가지 중공업을 발전시키는데 거기에 일본이 기술을 제공하게 되면 한국 발전에 따라서 일본도 그만큼 덕을 볼 수가 있다.’라고 보고 동의하였다. 그 일을 대통령께 보고를 올렸고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좋다. 그렇게 하자.”라고 하여 이듬해 착공식을 하여 오늘날 포항제철이 탄생하였다. 박태준이 포항제철 완공 마지막 콘크리트를 직접 넣었을 때 일본사람들이 대단하다고 했다. 만약 박태준이 대일 청구권 자금 일부를 쓰자는 제안을 하지 않았더라면 포항제철은 없었을 것이다.

    (대일 청구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또다시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것은 우리 동네에 있던 일본 저택이었다. 짭짤이 토마토로 유명한 대저에는 50여 년 전 내가 자랄 때에도 여러 채의 대궐 같은 일본식 집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시대 때 살다가 버리고 간 집이라고 했다. 그 집에서 일하던 한국인이 그 집을 차지한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2026년 현재는 대궐 같은 집이 두 채만 남아 있고 너머지 집들은 모두 재개발되어 공장이 들어서거나 식당이 들어섰다고 들었다. 그렇게 일제 강점기의 흔적을 보았던 일들이 이 책을 통해 연결되며 역사를 배우게 되고 있다.)

     




    p108~110 육영수 여사의 기행문과 재정차관

    함보른 탄광을 다녀온 육영수 여사는 다음과 같은 기행문을 남겼다.

    “웃음을 주고 위로를 주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계획이었다. 검은 눈동자와 황색 피부의 낯익은 우리 젊은이들의 환성 속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아프도록 가슴에 맺혀오는 무엇인가 뭉클한 감정이 솟아오르며 시야가 뽀얗게 흐려지는 것이었다. -중략-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핑계 삼아 나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흐느끼게 하고 말았다. ”

     

    “각하 서독이 우리나라 광부 250명을 받아들일 의사가 있다고 합니다. 국내에서 제때 일을 처리하지 않아 기회가 사라질지도 모르니 각하께서 빨리 처리해 주십시오” 1963년 12월 16일 한국과 서독 간에 제1차 광부파견 협정이 체결됐고, 12월 21일 제1진 123명이 출국함으로써 한국인 근로자의 서독 진출의 역사가 개막되었다.

     

    p121 “보릿고개를 없애고 수출로 나라를 세우자”

    p124~125 어린 시절 학교에 도시락을 싸 가지 못해 점심시간이면 교정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있다가 물로 배를 채운 사람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무말랭이나 장아찌 같은 것도 없는 부엌살림을 뒤지다 손가락으로 간장을 찍어 먹곤 했다. (중략) 어린 시절 배고픔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나라 국민들을 배고픔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총을 들고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쥐었다. 오죽했으면 혁명 공약에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라는 문구룰 넣었겠는가. (중략)

    참다운 인권과 민주는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에서 나옵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 대목을 읽다 보니 또다시 목이 메어오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우리 집도 그랬기 때문이었다. 보리쌀을 섞어 지은 밥일 망정 우리 남매들이 굶지는 않았으나 반찬은 거의 없었다. 어릴 때는 무말랭이가 뭔지도 몰랐고 반찬은 뭘 먹었는지 기억이 거의 없다. 좀 커가면서는 형편이 좋아지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님께서 앞날을 내다보고 행동으로 옮기신 일에 감동이 되며 감사와 아픔의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p129~137 산업체 부설 학교의 탄생

    1970년대 초 박정희가 경남 마산의 한일합섬 공장을 시찰하면서 다른 소녀들보다 어려 보이고 키도 작은 한 소녀를 본 대통령이 여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원이 무엇인지 물었다. “공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저도 영어 공부를 하고 싶어요. 영어를 잘 모르니까 감독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월급을 올려달라든가, 근무 여건 개선이 아니라 이 나이 어린 소녀가 영어 공부를 하고 싶다니~. 대통령 눈에 이슬이 맺혔다. 감정을 추스런 대통령은 한일합섬 사장에게 “이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없겠습니까?”라고 묻자 대통령의 뜻을 알아챈 김한수 사장은 중학교 과정부터 시작하겠다고 답했다. 대통령의 눈물로 1974년 산업체 부설 한일 여자실업고가 개교했다. (아~~ 야간학교도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로 만들어졌구나. 내가 진학을 못 하고 일을 하고 있을 때 야간학교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며 야간학교 다니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었던 때가 생각났다.)

     

    이 글을 읽어나가자니 저~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아련한 기억과 함께 또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소녀의 말에 공감이 되어 다시 목이 메어오고 있었다. 중학교도 못 갔다는 사실이 한이 된 나는 내 나이 50대 후반에 중학교 검정고시를 시작하여 고등학교도 검정고시로 졸업하고 60에 방송대를 졸업했다. 그랬으니까 눈물만 흘렸지만, 만약 그 만학의 공부를 해내지 못했다면 이 대목에서 후회로 목놓아 울었을지도 모른다.

    초등 졸업 후 버섯농장서 일하다가 김해 한일합섬 공장에 이력서를 내고 어렵게 취직이 되었다. 그러나 꿈에 부푼 것도 잠시~. 1977년도쯤 내 나이 17세 경이었다. 한일합섬은 방직공장이라 입사 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폐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하여 퇴사 요구를 받았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의사의 오진일 수도 있으니 재검사를 해서 다시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집 근처에 병원도 없었고 꼭 그렇게 해야만 하나? 싶어 포기한 것 같다. 그 후 국제상사에 입사하여 그곳에서 동료로부터 전도 받고 지금까지 믿음의 길을 걷고 있다. 만약 그때 일을 계속할 수 있었으면 어쩌면 나도 그 산업체 부설 중학교에 갈 수 있는 특혜를 누렸을 수도 있었겠으나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아픈 일을 통해 복음을 듣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하신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P140 서독방문에서 얻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아이디어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의 아우토반을 달리며 고속도로를 체험했고 아테나워 수상의 조언을 통해 고속도로가 경제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 들었다. 한국이 자립경제를 이룩하려면 고속도로가 필요하며 고속도로가 뚫려야 한국의 근대화가 본격화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고, 그 후 지도를 보고 인터체인지 선형을 직접 그려가며 자신의 꿈을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하여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공사를 시작했다. 1968년 8월 21일 기공식을 하고 1970년 7월 7일 2년 5개월 공사 후 조기 완공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때 처음으로 먼발치서 박정희 대통령님과 육영수 여사님을 보았었다. 우리 동네는 부마고속도로가 시작되고 연결되어 이어지는 그 당시의 주소로 ‘김해군 대저면’이었다. 그 당시 부마고속도로공사가 제법 진행되었던 듯, 기초공사로 도로를 닦아놓은 우리 동네를 지나는 미완성된 부마고속도로 위에서 멈추어 손을 흔들어주셨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에 대해 알고 나니 앞으로는 부산 가는 길이 더 정겨울 듯하다.~

     

    P206~207 물 혁명

    내가 원할 때 깨끗하고 위생적인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하는가가 바로 문명의 척도다. 제주도는 지형적 특성상 물이 부족한 지역이었다, 마실 물이 귀했기에 제주도 역사 개막 이래 수 천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주민들이 대대로 고통을 겪었다. ‘깨끗한 물의 무제한 공급 시스템’을 건설하여 제주도를 문명사회로 탈바꿈 시긴 주인공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중략) 제주도 내에서 상수도로 깨끗한 물을 공급받는 인구는 전체도민 30만 명 중 서귀포와 제주시 일부, 중문 등 4개 지역의 3만 5천 명. 상수도 보급률은 1961년 10%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24시간 급수가 아니라 제한 급수방식이어서 수도를 틀어도 물이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 여기까지 읽어내려가는데 또다시 어릴 때의 우리 집 부엌과 환경이 떠올랐다. 우리 동네는 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 우물이 식수이자 빨래터였다. 집 집마다 있는 게 아니고 개인 우물이지만 공동 우물이 되어 있었다. 그 우물 중에는 수질이 안 좋아 ‘도깡’이라 불렀던 드럼통에 자갈을 채워 수질이 안 좋은 물을 드럼통에 부어 걸러서 흘러내린 물을 길어왔다. 좀 멀리 가면 있는 그 우물은 깊어서 물맛도 좋았으며 바로 길어올 수도 있었지만, 주인이 있을 때는 갈 수가 없었다. 하교 후에는 물을 길어와서 부엌의 큰 항아리에 가득 채우는 게 나의 일이었다. 그 물로 세수도 하고 쌀을 씻어 밥을 해 먹고 설거지도 하였다. 비가 오면 빗물 받아 머리도 감고 빨래도 하였는데 빗물은 머릿결이 매끄럽고 빨래 때도 잘 빠지는 좋은 점이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수도가 들어왔는데 누구보다 아버지께서 너무나 좋아하셨다. 처음에는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물이 나왔다. 그래서 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호스를 연결해서 커다란 고무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그래도 계속 나오면 큰 그릇마다 물을 채우느라 바빴다. 언제 또 물이 나올지~ 또는 안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점부터 강으로 빨래하러 가지 않아도 되었고 물을 길으려고 남의 우물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 종일 물이 나오는 세상을 만났는데 그 시기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지만 그야말로 우리 동네도, 우리 집도 문명 시대를 만난 것이었다. 부모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셨던지~~.

    그 힘든 세상을 편하고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주신 박정희 대통령님! 감사합니다.

     

    P 246 대통령의 암행 시찰

    박정희는 자주 경호원 없이 수행원 몇 명과 함께 민정 시찰을 다니곤 했다. 하루는

    경호원 없이 몇 사람의 동행자와 함께 경기도 여주 남한강 변의 포플러 단지 암행 시찰에 나섰다. 귀로에 남한 강변의 주막에 들어가 막걸리를 시켰다. 당시 정황을 김인만의 저서<임자 막걸리 한잔하세>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중략) 동행자들은 이럴 때 박정희를 박 사장이나 박 선생 등으로 불렀는데, 장소가 장소인 만큼 때에 따라 너나들이 사이가 되어도 좋다는 자유가 허용되어 한껏 풀어진 자세가 되곤 했다. 손님들과 막걸리 사발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할머니가 갑자기 박정희의 무릎을 쳤다. “아이고, 이 양반이 꼭 박정희를 닮았네. 신문에서 본 그대로야. 똑같애.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지 몰라.”“주모! 내가 왜 박정희를 닮아? 모두 들 박정희가 날 닮았다고 하는데.” 얼굴이 불콰해진 주모 할머니는 세상살이 불평을 늘어놓더니 정부에 대해 욕사발을 퍼붓기 시작했다. 동행자들은 술기운이 싹 가시면서 안절부절 못 하는데, 정희가 흥에 겨워 추임새를 넣어주니 잔뜩 기세가 오른 할머니는 군수, 경찰서장, 지서 주임에서 아무개 순경까지, 또 면장과 면서기들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죄상’을 낱낱이 폭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다시 박정희에게로 돌아왔다. “박정희는 새까맣고 조그만 게 어찌 그리 간이 큰지도 몰라. 하도 단단해서 돌로 쳐도 안 죽을거야.”

    (중략)

    비서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 주모한테 민정을 잘 전해 들었고, 좋은 충고도 고맙게 받아들이겠다고 그 군수하고 서장한테 전해주게”

    이 내용을 읽을 때는 미소가 절로 나왔다. 서민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이 책 곳곳에서 성격이 강력한 모습과 반대로 육영수 여사와의 대화나 국민들과의 대화에서는 자상한 지도자의 모습을 볼 수가 있어서 좋았다.

     

     

    P 283 비서들이 질겁하는 이유

    박정희 대통령은 국무회의 석상에서 행정 간소화를 위해 장관들이 대통령에게 보고할 일이 있을 때 전화를 사용하라고 적극적으로 권했다, “전화로 2~3분이면 간단히 끝낼 일을 일일이 찾아와 보고 하느라 대기하는 방식으로는 능률이 오를 리 없고 시간 낭비”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 급한 일이 있으면 전화를 직접 하십시오. 만나러 오가는 시간, 기다리는 시간,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시간, 그러다간 하루에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내 직통 전화를 되도록 많이 이용하십시오.”

    대통령은 청와대의 대통령직통 전화번호를 각 장관에게 알려 주었다.

    (얼마나 실용적인 정치를 하셨는지를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알 수가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60년대와 70년대의 경제성장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자세히 알 수가 있었다. 독재를 무릅쓰고 배고픔을 해결하시고 경제를 살리신 그 심정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였다.

     

    후반의 이야기는 너무 감당하기 힘들어서 내 생각이나 감정을 쓰기가 어려웠다.

    전체 이야기를 너무나 재미있게 역사적으로 살아 있는 글을 가슴 뭉클하게 여러 가지 에피소드까지 곁들여 독자를 울린 저자 김용삼 대기자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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