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성도님들! 한 주간도 주님안에서 평안하셨나요.. 아직 완전한 폭염이 오지 않은 7월입니다. 미디어를 통해 우리나라와 달리 유럽은 연일 40도를 웃도는 폭염이 계속되고 있으며, 베네수엘라와 여러나라들에서 강도 높은 지진으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의 소식도 들립니다. 죄로 인해 땅의 부패도 그 범위가 마지막때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으며 주님의 다시오심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모임을 나누며 한 자매님께서 아무것도 모르고 교회 다닐때는 그저 평안하다고 생각했지만 바른성경과 교회와 정치를 알수록 혼이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신자로서 속히 오실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평범한 일상만을 추구하는것이 아닌,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긴박성을 마음에 담고 살아야겠습니다. 이번주는 챕터15. 세계로 뻗어나간 침례교 - 선교 확장과 영적 부흥(AD1870-현재)이며, 20세기 침례교의 세계 확장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냉정하게 평가해야 할 빛과 어둠을 함께 품고 있다. 이 장에서는 침례교가 어떻게 대륙을 넘어 복음주의 운동의 심장부가 되었는지, 또 어떤 실패와 교훈을 남겼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 19세기 선구자들 - 선교의 씨앗들 - 20세기 침례교의 세계 선교는 19세기에 뿌려진 씨앗에서 자라난 열매였다. 그들의 헌신이 후대 선교의 토대가 되었다. - 윌리엄 케리(1761-1834)는 근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며 41년동안 인도에서 사역하였다. 성경을 인도어로 번역하고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또한 사회 개혁에도 참여하여 '사티 반대운동'을 이끌었으며, 그는 삶을 통해 선교의 필요성과 가능함을 입증하며 다른 선교사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자매:인도의 사티제도를 보면 악의 본질은 무엇일까 하는것과 열악한 여성 인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성과 아이들도 관심과 사랑으로 대하시며 사람의 평등함을 가르쳐 주셨지만, 사람의 악함은 시대를 불문하고 진행되는거 같습니다. 인도도 사티라는 악한 제도가 있었지만, 선교사들을 통해 바른진리를 배우며 결국은 제도가 변화되고, 선교는 개인과 조직 나아가 국가도 변화시킬수 있음을 그들은 삶을 통해 보여준것 같습니다.)
- 아도니람 저드슨(1788-1850)은 버마,현 미얀마에서 사역했으며 저드슨의 선교사역 후원을 통해 미국 침례교 해외선교의 공식 지원이 시작되었다. 로티 문은 중국 선교사였다. 당시 여성 선교사들에게 기대되던 역활은 교육과 의료였지만, 로티 문은 직접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중국인 지도자들을 훈련했다.
(자매:로티문은 여성 선교사임에도 어렵고 힘든 곳에서 평생을 선교사역에 헌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1912년에 기근중인 중국인들을 위해 헌금을 요청하였고, 그 후에도 헌금 모금은 멈추지 않고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한 선교사의 요청으로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세계 선교를 위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동이 됩니다.)
● 20세기 초 - 선교의 황금기 -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개신교 선교의 '황금기'로 불린다. 왜 이 시기에 선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을까? 첫째, 교통과 통신의 발달. 둘째, 서구 제국주의. 식민지배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지만 선교사들에게 접근 기회를 제공했다. 셋째, 부흥 운동의 영향. 넷째, 교회의 재정적 여유. 다섯째, 침례교의 조직적 성숙. 선교를 위해 남침례교의 외국선교 이사회, 북침례교의 선교회가 수백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자매: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제국주의는 도덕적 악함이라는 결함이 있지만, 그럼에도 쉽게 판단할 수 없는것은 하나님께서는 제국주의라는 악함조차 사용하셔서 선교 확장의 기회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 1905년 - 세계침례교연맹의 탄생 - 침례교가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면서 전 세계적 연결과 협력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05년7월, 런던 매트로 폴리탄 태버내클에서는 23개국 약3,000명의 대표들이 모여 '세계침례교연맹'을 조직했다. - 세계침례교연맹의 목적은 명확했다. 첫째, 친교. 둘째, 증언. 침례교 원칙들(성경의 권위, 신자침례, 회중정치, 정교분리) 셋째, 협력( 선교, 교육, 출판, 재난구조) 넷째, 종교의 자유와 인권을 옹호한다. 중요한 점은 세계침례교연맹은 교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각 국가의 침례교 조직을 연결하고 격려하며 협력을 촉진할 뿐이다.
● 지역별 확산 - 침례교가 뿌리내린 곳들 - 아시아는 침례교 최전선이었다. 인도는 윌리엄 케리 덕분에 침례교가 가장 먼저 뿌리 내렸으며, 20세기 초까지 수백개의 침례교회와 수만 명의 침례교인이 있었다. 버마(미얀마)는 아도니람 저드슨의 사역지였고, 미얀마는 침례교인 비율이 가장 높은 아시아 국가 중 하나이다. 한국에 침례교가 들어온것은 1889년경이며, 특히 한국 침례교는 선교 열정으로 유명해졌다.
(자매:신약 교회사 책을 접하기 전에는 인도나 미얀마의 침례교인은 상상할수 없었습니다. 이슬람 국가인 이란에도 수백만 기독교인이 있다는 기사를 접한적이 있습니다. 침례교가 우리나라에 전파 된후 많은 부흥과 더불어 세계 선교에도 힘을 쏟았으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바른 신약교회를 하지 않고 개신교와 같은 교단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욱 킹제임스성경의 보급이 필요하고 미디어사역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 아프리카는 20세기 동안 가장 극적인 성장을 경험한 대륙이었다. 2000년이 되자 인구의 약50%가 기독교인이었다. 남미의 브라질총회는 약100만명 이상의 회원과 수천개의 교회로 성장했다. 독일 침례교는 나치시대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등 동유럽은 공산주의로 박해를 받았으나 교회는 살아남았고 다음 세대에 신앙을 전했다.
● 1920 - 1930년대 -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 - 20세기 초, 미국과 유럽의 개신교는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에 휘말렸다. 단순한 학문적 토론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성경의 권위를 둘러싼 전면적인 충돌이었다. - 현대주의(자유주의)는 19세기 유럽에서 발전한 신학적 흐름이며 전통적 기독교 교리를 현대 사상에 맞추어 재해석 하려했다. 그 결과 성경의 무오성과 기독교 핵심교리를 수호하려는 반작용으로 근본주의 운동이 일어나,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신앙의 본질을 지키려는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자매:19세기는 계몽주의,이성주의, 비평주의가 주류를 이루는 사회였기에 바른 신앙을 하려는 사람들이 처해진 환경이 쉽지 않았을것 같아요. 진리를 지키지 못하면 결국 동화되고 결국은 진리에서 이탈할 수 있기에 현대주의에 맞선 근본주의자들의 투쟁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우리나라의 상황만 보아도 충분히 가늠이 됩니다.)
- 많은 교단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제도적으로 수용하면서 통합과 포용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침례교는 진리와 타협한 제도적 일치는 참된 일치가 아니라고 여겼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성경적 신앙을 지키려는 독립침례교회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 1940 - 1950년대 복음주의 형성 -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은 미국 개신교를 사실상 두 진영, 즉 성경대로 믿는 근본주의자들과 인본주의 자유주의자들로 나뉘었다. 1940-1950년대에는 근본주의 신학적 보수성을 유지하면서도 근본주의의 분리주의와 반지성주의를 거부한 '복음주의' 운동이 새로이 등장했다. - 복음주의 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신학적 보수성이었다. 핵심 메시지는 언제나 십자가와 부활이었다. 또한 근본주의와 달리 신앙을 지키면서도 문화와 대화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 복음주의 운동 역시 시간이 흐르며 심각한 한계를 드러냈다. 복음주의 신학의 대표 기관인 풀러 신학교에서 성경의 무오성을 포기하고 신학적 다원주의와 비평적 접근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자매:복음주의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가가려 했던 문화속에서 오히려 교회는 공감 가능한 메시지로 진리와 타협하며, 소비 가능한 신앙이라는 명목하에 교회를 소비자의 입장에서 선택하는 오류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문화 가치관과 진리가 상호 보완이 아닌 타락한 복음주의의 모습이 한국 교회안에서도 너무 많이 발견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 빌리 그래함 - 20세기의 목소리 - 빌리 그래함은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기독교 지도자 중 한명으로 꼽힌다. 1947~ 1947년까지 약400회 이상의 전도 집회를 인도했으며, 공식 기록에 따르면 그의 집회에는 전 세계적으로 약 2억명 이상이 참석했다. - 그의 설교는 킹제임스성경을 기초로 하여 복잡한 신학 체계나 정치적 논쟁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성경본문을 읽고 설명하며, 성경이 말하는 복음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찌른다고 믿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회개하고 그분을 믿으십시오" 그는 설교자의 수사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역사한다고 확신했다.
(자매:빌리 그래함 말년의 배교 모습 뒤에는 결국 타협이라는것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라는 명목으로 구체적 교리와 교회가 분리되어야 함은 감추고 공통의 복음 메시지 만으로 경계선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명예와 돈을 추구하며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만나서 세상과 분리됨이 아닌 타협으로, 그의 마지막 모습은 우리가 경계 해야하는 본보기의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 침례교의 관점에서 볼때, 그래함의 유산은 빛과 그림자를 함께 지닌다. "복음을 넓히려 할 때, 어디까지가 접근이고 어디서 부터가 타협인가?"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 1979년 이후 - 남침례교의 보수적 회복 운동 - 1970년대 후반, 남침례교 교단내에서도 신학적 긴장이 증가했다. 일부 신학교 교수들과 목사들이 자유주의적 견해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 보수주의자들의 조직적 행동과 특히, 보수적회장을 선출하려는 노력으로 2000년 남침례교는 개정된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를 채택했는데, 이전의 신앙 고백보다 더 명확하게 보수적 입장을 표명했다. 특히,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했으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남침례교는 명확하게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교단이 되었다.
● 결론 - 침례교의 성장은 복음주의 운동의 성장과도 맞물려있었다. 침례교는 20세기 근본주의 및 복음주의 중심에 있었고, 이것들은 침례교의 메시지를 전세계로 확산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회심, 십자가, 성경의 권위는 근본주의 및 복음주의의 핵심이며 동시에 침례교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너희가 아는니라. (고전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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