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 기관/부서
  • 자매모임
  • 교회
  • [교회]자매모임- 신약교회사 9조회수 : 79
    • 작성자 : 최성미
    • 작성일 : 2026년 5월 2일 14시 38분 38초
  •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한 주간도 평안하게 지내셨나요?

    지난주 목사님의 설교는 신약교회사를 읽고 배우며 알게되는, 많은 역사적 사건 속을 관통하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자기 행위는 악하고 자기 형제의 행위는 의롭고 올바르기에 사악한 자가 참을수 없어서 죽였다는것, 그것은 모든 시대 순교자들의 원형이고 거짓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핍박하는것이 세상의 역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초대교회부터  침례교회가 세워지기까지의 모든 교회 역사속에 있는 고난과 박해가 왜 일어나는지 수긍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주는 챕터9. 영국 침례교의 탄생과 확산에 대해 살펴보고 나누었습니다.


    ● 영국 침례교의 탄생 및 확산 - 분리 주의에서 침례교로 (AD1534 - 1689)

    - 16~17세기 영국 교회는 국왕이 머리인 전형적인 국가 교회 체제였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회심한 신자들의 자발적 교회, 신자침례, 정교분리,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는 침례교가 태어날수 있었을까?

    - 이 장에서는 헨리8세의 종교 개혁과 1689년 관용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침례교의 원리를 통해 근대 자유주의 역사에 어떤 출발점을 남겼는지 살펴 보려한다.


    ● 헨리8세의 종교 개혁 - 권력의 이동, 복음의 회복은 아니었다

    - 1534년 영국 왕을 '영국 교회의 유일한 최고 수장'으로 선언한 수장령이 통과되며 영국의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영국의 종교 개혁은 매우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신학적 개혁이 아니라 권력의 이동이었다.


    (자매:수장령으로 종교 개혁이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카톨릭의 교리와 색채가 많이 남은 영국 교회에 한가지 변화는 영어로 번역된 틴데일 성경이 비치 된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수 있었던 이 작은 변화가 점진적으로 영국을 변화시킨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 국가 교회 체제의 문제점

    - 헨리8세 이후, 에드워드 치하에서 영국 교회는 개신교의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후 왕위를 계승한 메리1세는 영국을 다시 로마 카톨릭으로 돌리려했다. 수백명이 순교 된 메리의 박해는 역효과를 낳고 '블러디 메리' 라는 오명을 얻었다. 메리 이후 등극한 엘리자베스는 중도적 절충을 추구했다. 그녀는 영국을 다시 개신교로 세우되 카톨릭 신자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수장령과 함께 통일령을 통과시켜 이 두법은 영국 국교회의 성격을 결정짓는 기초가 되었다.


    (자매:지도자나 정권이 바뀔때마다 고난과 박해가 반복되는 역사를 바라보며, 사람은 본성이 악하기에 역사속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반복하여 악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것을 봅니다. 그럼에도 신약 교회역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 할때는 여전히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 국가 교회체제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고 결국, 성경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은 점점 더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국가 교회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들이 나중에 청교도 운동과 분리주의 운동, 그리고 결국 침례교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 청교도의 등장 - 안에서 개혁하려는 시도

    -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안에 남아 있으면서 교회를 개혁하려 하였다. 그들이 원한것은 예배를 더 단순하게 만들고 개인적이고 경건한 삶을 강조했다. 그들은 교회를 개혁하고 싶어했지만 국왕과 의회등 국가가 통치하는 정치적 현실에 부딪히게 되었다.


    ● 분리주의 등장 - 밖으로 나가는 선택

    -16세기말,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는 한 참된 계혁은 불가능하기에 성경에 따라 독립적인 회중을 세우는 분리주의자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청교도들과 많은 신학적 확신을 공유했지만 그들과 달리 국교회를 떠났다.

    - 1593년 배로와 그린우드라는 두명의 분리주의 지도자가 런던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들의 죄목은 '여왕폐하의 권위를 부정하고 국교회를 비방하며 반란을 선동한 죄'였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은 성경에 따라 독립적인 교회를 세운것 뿐이었다.


    ● 존 스마이스 - 진리를 찾는 순례자

    - 1600년경, 스마이스는 링컨시의 공식 설교자로 임명 되었는데 이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그는 성경을 강해하는 강력한 설교자로 알려졌으나 그의 설교는 점점 더 국교회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게 되었다. 1602년 해임된 후 분리주의 회중에 합류 했으며,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 하였다.


    (자매:지금껏 종교 개혁을 하려고 노력한 사람들 대부분이 명석하고 많은 공부를 한 분들이네요. 존 위클리프, 루터, 칼빈, 얀 후스, 그리고 존 스마이어스등, 하나님께서 교회 역사의 흐름을 바꾸실때 쓰임을 받은 면면을 살펴보면서 한국의 선교 초기와 그 이후에도 바른 성경지식을 가진 목회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현재의 한국 교회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 스마이스는 메노나이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메노는 신자 침례의 성경적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했고 자발적 교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또 다른 근본적인 의문에 직면하며 참된 침례에 대한 정당성과 기원을 묻게 되었다.

    - 1609년 신약교회 회복을 위해 성경적 원리로 돌아가야 함을 깨달은 스마이스는, 스스로 침례를 주는 '자기침례'를 시행한 후 즉시 회중의 다른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기 시작했다. 이것이 최초의 영국 침례 교회의 탄생이었다.

    - 스마이스와 그의 회중의 신학은 일반 속죄 또는 보편 속죄를 주장하는 일반 침례교로 불리게 된다.


    ● 토마스 헬위스 - 영국 땅에 침례교를 세우다.

    - 1612년초, 헬위스와 약 10~12명의 동료들이 영국으로 돌아왔다. 런던 외곽의 스피털필즈 지역에 정착해 자신의 집에서 작은 회중을 모았다. 이것이 영국 땅에 세워진 최초의 침례 교회였다.

    - 1612년 헬위스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책을 출판했는데 제목은 [불법의 신비에 대한 짧은 선언]이었다. 이 책은 로마 카톨릭과 영국 국교회의 오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의 가장 혁명적인 부분은 양심의 자유에 대한 선언이었다. "왕은 영혼의 주인이 아니다"


    (자매:헬위스는 탁월한 지도자였다는 것을 보며 진정한 리더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아니었어도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종교의 자유와 영혼의 자유를 위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 임에도 행동으로 보여주는 모습을 통해 리더의 본을 보여 준것 같습니다.)


    - 헬위스의 대담한 선언은 결국 가혹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순교자였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정교 분리를 위해, 침례교의 원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 종교적 다양성의 확대

    - 왕당파와 의회파의 충돌로 내전이 일어나 국교 체제가 약화되는 사회적 배경이 형성 되었다. 또한 종교적 다양성이 점차 허용되기 시작한 환경이 마련되었다. 의회파의 승리로 크롬웰이 집권하면서 그는 종교적 관용을 지지하며 양심에 따라 예배 할 자유를 허용했다.

    - 1651년 일반 침례교는 '표준고백'이라는 신앙고백을 발표했다. 이 고백서는 삼위일체, 성육신, 속죄, 부활, 재림같은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들을 확증했다. 동시에 침례교의 독특한 원리들[신자 침례, 회중 정치, 정교 분리]을 명확하게 선언했다.


    ● 박해 속 성장

    - 박해는 명목상의 신자들을 걸러냈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떠났다. 그러나 진정한 신자들은 남았는데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었다. 박해는 침례교의 핵심 원리를 확증했다. 정교 분리가 왜 중요한가? 바로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면 국가는 언제든지 진리를 억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매:허가없이 설교한 죄목으로 감옥에 갇힌 존 번연의 상황은 앞을 보지 못하는 딸과, 가족이 견뎌야하는 궁핍함이 감옥에서 겪는 고통보다 크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천로역정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쓸수 있었던것은 그가 구원의 확신 가운데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도 목적을 이루신다는것을 다시 한번 더 알게 됩니다)


    - 1689년, 새 정부는 '관용법'을 통과 시켰는데 이 법은 삼위 일체를 믿는 모든 개신교도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했다. 사회적 차별은 여전히 있었지만 법적 박해는 끝났다.


    ● 결론 - 대서양을 향하여

    - 17세기말, 영국 침례교의 원리들은 대서양을 건너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침례교는 특별한 역활을 하게된다. 침례교는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정교 분리를 주장했으며 양심의 자유를 옹호했다. 로저 윌리암스, 존 릴랜드, 아이작 백커스 같은 침례교 지도자들은 미국 헌법의 종교 조항 형성에 기여했다.


    (자매:메이플라워호를 재현해 놓은것을 보았는데 그때 얼마나 열악한 환경이었을지 가늠할수 있었습니다.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온 신앙인들, 거저 주어지는것은 없고 늘 희생을 통해 이루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 된 씨앗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쳐 영국에 심어졌고 그것이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 거대한 나무로 자랐다. 소수의 신실함이 다수의 타협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침례교 역사는 권력이 아니라 원리의 승리이다.

    1000012678.jpg

     

    1000012675.jpg

     

    1000012671.jpg

     

    1000012668.jpg

     

    1000012664.jpg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텔레그램으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