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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자매모임- 신약교회사 8조회수 : 36
    • 작성자 : 최성미
    • 작성일 : 2026년 4월 25일 14시 32분 47초
  • 안녕하세요, 성도님들!

    신약교회사를 지난주까지는 part 1, 챕터 7까지 공부하고 나누어 보았습니다.

    최초의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 예루살렘에서 회심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작은 공동체였다. 사도행전 이후 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AD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가 공인되었고 AD380년 데살로니가 칙령으로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국가교회가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변하기 시작했다. 어거스틴에 의해 천주교 신학이 완성되며, 교회가 교회를 박해하는 시대로 접어 들었다. AD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후 정치, 교육, 행정등 모든 분야에 로마 카톨릭교회가 지배하게 되며 약 1,000년의 중세 암흑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소수임에도 박해를 견디며 이어져 왔다. 왈도파, 존 위클리프, 얀 후스등이 그들이다. 루터의 95개 논제로 촉발된 16세기 종교 개혁은 유럽의 어둠을 깨운 거대한 사건이다. 지난주까지 루터와 칼빈, 그리고 츠빙글리의 미완성된 개혁까지 알아 보았습니다. 이번주 부터는 part 2. '신약교회 회복 운동으로서의 침례교'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 챕터8. 스위스 재침례교회 - 신앙의 자유를 향한 여정의 출발

    - 오직 성경을 외치던 개혁의 한 복판에서 왜 성경대로 믿고 교회를 세우려 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이단으로 정죄 되었는가? 왜 루터파와 츠빙글리에게 까지 박해를 받고 수장 되기까지 했는가? 이 장에서는 스위스 취리히 개혁의 중심에서 재침례교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리고 최초의 신자 침례와 슐라이트하임 신앙 고백이 어떤 핵심 원리들을 세웠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 개혁의 불길이 알프스를 넘다

    - 1517년10월31일, 마르틴 루터의 95개 논제 게시이후 종교 개혁의 불길은 유럽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에 도달했는데, 이곳은 자치적인 국가들의 연합이었으며 교회 개혁은 시의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진행 될수 있었다. 재침례교 운동은 스위스 취리히 리마트강이 흐르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 울리히 츠빙글리 - 스위스의 개혁자

    - 중세 교회에서 설교는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달랐다. 그는 성경 본문 자체를 깊이 파고 들었고 교회의 전통을 성경의 빛으로 검토했다. 그의 설교는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처음으로 자기 언어로 성경의 의미를 명확하게 듣게 되었다.

    - 1522년 사순절 기간에 소시지를 먹는 사건이 벌어지며 큰 논쟁이 촉발되었고, 사순절 금식 규정에 대해 공개적 토론이 시작 되었다. 츠빙글리는 67개조 논제를 제시하여 카톨릭측을 반박하며 시의회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취리히 종교 개혁의 공식적 시작이었다.


    ● 젊은 급진파들 - "성경만으로 충분하다"

    - 많은 젊은이들이 츠빙글리의 개혁에 열정적으로 동참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콘라트 그레벨, 펠릭스 만츠, 게오르그  블라우록 등이며 츠빙글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정기적으로 모여 초대 교회의 모습을 연구했으며 당시 교회와 비교하였다.

    - 신약교회와 16세기 교회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침례는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에게 주어졌지만, 16세기에는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 주어졌다. 신약 교회는 국가와 독립적이었지만 당시의 교회는 국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츠빙글리는 점진적 개혁을 원했지만, 젊은 개혁자들은 성경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두 그룹간의 충돌은 불가피 해졌다.


    (자매: 젊은 개혁자들과 츠빙글리의 충돌을 보며, 사도행전의 바울도 바나바와 의견이 달라서 충돌하고 각자의 길을 간 사례가 있듯이, 특히 이 때는 중세의 벽과 시대의 상황이 주는 어려움이 있었기에 이해되는 부분도 있는것 같습니다.)


    ● 유아 세례 논쟁 - 갈등의 폭발

    - 갈등이 폭발한 지점은 유아 세례 문제였다. 이는 단순한 신학 논쟁이 아니었고 교회론, 국가론, 사회구조 전체와 연결된 이슈였다. 출생 등록이 시민권 부여였으며 사회 편입이었다. 더 나아가 유아 세례는 국가 교회 체제의 핵심이었다.


    (자매: 유아 세례, 자동 시민권, 자동 교회  회원등을 읽으며 우리 교회의 회원 가입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40개 필수 설교를 듣고, 교회의 철학이나 교리를 바르게 알고, 받아 들인후 회원이 되는 절차는 신약 교회와 침례 교회가 추구하는 바른 모습이라고 생각 됩니다.)


    - 논쟁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1524년 10월, 취리히 시의회는 유아 세례를 거부하는 자는 처벌 받는다는 경고를 하였다. 다음해 1월에는 그레벨, 만츠 그리고 반대론자들은 취리히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 명령은 결정의 순간을 만들었다. 시의회에 순종 할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결과를 감수 할것인가?


    ● 1525년 1월 21일 - 재침례교의 탄생

    -'그때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하느니라' (행5:29)

    - 블라우록은 믿음을 고백하는 성인으로서 성경대로 침례를 받기 원했다. 그레벨은 물 한 그릇을 가져와서 신앙을 고백하게 한 후, 머리에 물을 부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의 신앙 고백에 따라 아버지와 성령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침례를 줍니다. 그 순간부터 재침례교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신약 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역사적 결단이었다.


    (자매: 재침례교가 탄생하던 그날 저녁,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것은 무엇인가? 질문하고 기도하던 모습을 읽으며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할 질문인것 같습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 두려운 마음으로 늘 자신을 점검 해야겠습니다.)


    ● 재침례교 신학과 실천 - 슐라이트 하임 신앙 고백

    - 1527년 2월 24일, 스위스와 독일 국경 근처의 슐라이트 하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재침례교 지도자들의 모임이 열렸다. 이 모임에서 '슐라이트 하임' 신앙고백이 작성 되었는데 이는 재침례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초기 문서 중 하나이며, 후대 침례교 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 슐라이트 하임 신앙고백 제1조: 믿는 자 들에게 주어지는 침례. 제2조: 거룩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파문(출회). 제3조: 주의 만찬. 제4조: 세상으로 부터의 분리. 제5조: 목회자는 교회가 선택한다. 제6조: 칼, 즉 무력이나 폭력은 안된다. 제7조: 법정에서 맹세. 충성서약을 거부한다.


    ● 박해의 시작과 확산

    - 1526년 11월, 슈파이어 제국 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는 재침례교에 관한 법이 통과되었다. 재침례를 받거나 주는 모든 자는 화형, 참수, 익사 또는 재판없는 처형이 그 법이었다. 1527년 1월 5일, 취리히 리마트 강변에서 펠릭스 만츠가 처형되면서 그는 재침례교 운동의 첫번째 순교자 중 한 명이 되었다.

    - 1527년 5월, 슐라이트 하임 신앙 고백을 이끌었던 사틀러는 아내 마르가레타와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판결문에는 "그의 혀를 자르고 뜨거운 쇠로 몸을 일곱 번 지진 뒤 그를 불태워 재로 만들라"는 끔찍한 형벌이 기록되었다. 재침례교인들의 피는 유럽 곳곳에서 흘렀고 초기 재침례 운동은 혹독한 박해 속에서 확산 되어갔다.


    ● 뮌스터의 비극 - 재침례교의 오명

    - 1534년부터 1535년까지 독일의 뮌스터 시에서는 일부 급진적인 재침례교도들이 도시를 장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뮌스터에서 벌어진 광신과 폭력은 오랫동안 재침례교 전체의 이미지를 훼손했고 '재침례교인'이라는 이름은 '위험한 과격파' 라는 의미로 오해되었다.


    (자매: 수많은 평화로운 재침례 신자들이 아무 관련이 없음에도 오명으로 고통을 당하게 된것은, 마귀가 일하는 방식인것 같습니다. 미리 선점하여 조직적으로 방해하는것, 킹제임스성경 논란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마귀의 역사가 아닌가 합니다)


    ● 재침례교가 침례교에 남긴 유산

    - 재침례교와 후대 침례교의 관계는 오랫동안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주제였다. 과연 직접적 조직적 연속성이 있는가? 아니면 영적, 신학적 계승 관계인가? 가장 정확한 이해는 이것이다. 재침례교가 남긴 후대의 열매라는 점에서 분명한 연속성이 있다. 그들이 박해속에서 피로 확증한 원리들을 침례교가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세계적 운동으로 성장 시킨것이다.

    - 재침례교의 영향은 스위스에서 시작되어 영국으로,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 북미로 이어졌다. 로저 윌리암스는 재침례 전통에서 강조해 온 양심의 자유와 정교 분리의 원칙을 실천하며 로드 아일랜드를 세웠고,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후 이러한 원리는 미국 헌법 수정 조항 제1조에까지 반영되며 국가 체제의 기초가 되었다.


    (자매: 미국의 헌법은 현대 사회 자유 민주주의 기틀이 되었는데, 그들의 자유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엿볼수 있는것 같아요. 무엇보다 종교의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 영혼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된 일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면 이루어질수 없는 일이었을것 같습니다)


    ● 결론 - 취리히의 유산과 오늘 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 1525년 1월 21일 저녁, 취리히의 한 작은 방에서 일어난 일은 세계사를 바꾸었다. 그날 밤 몇명의 젊은이들이 서로에게 침례를 주었을때 그들은 단순히 종교 의식을 거행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학적 혁명이며, 천년 이상 지속되어 온 교회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 오늘 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자 침례 - 이 모든것은 성경에 손종하려고 한 침례교 성도들의 고난의 유산이다. 그들의 원리가 우리의 정체성이며 침례교의 길이다. 이 길이 취리히에서 시작된 길이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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