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의 추가글조회수 : 5886
    • 작성자 : 김학준
    • 작성일 : 2009년 7월 31일 8시 42분 39초
  • 아래의 "신앙의인"에 대한 출처 문의가 있었는데요, 저도 이전에 블러그를 통해서 받은 글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원본 출처는 저도 정확히 모릅니다.  다만 어느 겸손하신 목사님이 이름을 밝히시지 않고 글을 올린 것으로 이해합니다.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이 추가로 쓰신 글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공유 드립니다.  좋은 부분만 취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분에 대한 책 및 사상은 인터넷을 검색하시면 될 것 습니다.
     
    저는 내일부터 일주일간 여름 휴가입니다.  아이들이 어려서 일주일 내내 물속에서 지내야 할 것 같구요, 지난번에 목사님이 추천해주신 책을 어제 구매했고 휴가기간동안에 짬짬이 읽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여름 휴가 알차고 건강하게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
    --------------------------------------------------------------------------------------------------------------------------------------------------------------
     
    이제야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평안과 구원의 길)
     
     
    우찌무라 간조 목사의 글
     
     
    마지막 시도, 목사의 길
    자선 사업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한 나는 마침내 극단적인 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목회 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위선적이고 파렴치한 사람들이 많지만, 목사보다 더한 사람이 있을까? 사실 과거에 나에게 여러 사람이 신학 공부를 권했었다. 그러나 나는 목사를 나의 직업으로 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목사는 내가 생각하는 목사와 달랐다. 나는 바울과 같은 목사가 되고 싶었다. 나는 루터와 같은 목사가 되기를 갈망하였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제대로 성경을 배우지 못했고, 충분한 경험이 없으며, 자신의 죄와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알지도 못하고,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신학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목사가 되어서 설교 단상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목사직에 대해서 환멸을 느껴왔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마지막 제물을 바치고 목사로서 최대의 고난을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에 평안을 주실 것이다 라고 믿었다. 내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목사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신학교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인생 최대의 행복을 얻고자 하였다.
     
    신학교에서의 실망
    신학교에서 배운 어떤 학문들은 나의 사상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연구를 통해서 나는 모세와 바울을 직접 대면하는 듯한 감격을 맛보았다. 그러나 신학이라는 학문을 여기서 제한하였더라면 좋았을텐데, 유감스럽게도 진지한 성경 연구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오히려 영혼을 구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웅변학, 설교학, 목회학, 변증학과 같은 것들을 공부하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쳐야만 하였다. 나는 모세와 바울이 배웠던 신학을 배우고 싶었지만, 신학교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신학교 역시 나의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신학교의 아침 기도회, 쉴 새 없는 찬미소리도 내 마음 속에 있는 죄의 사슬을 벗겨주지 못했다. 성경 연구, 기도, 찬미와 같은 것들이 학문의 대상이 되고, 의무로서 나에게 부담을 주었을 때, 그러한 것들이 더 이상 거룩한 힘으로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더우기 종교 비판학과 같은 강의 시간에는 두려운 마음 없이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거룩한 이름을 마치 오래된 돌멩이나 나무조각의 이름처럼 불러댔다. 신학교에서 내가 경험했던 위험은 바로 신성모독의 죄였다.
    신성모독에 대한 형벌은 마음이 죄의 죄됨을 느낄 수 없는 상태로 전락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룩한 성경 말씀이 죄인의 심령을 치료하고 죄의 사슬을 끊어주는 능력으로 다가오는 대신에 하나의 학문과 학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나는 죄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려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신학교에 있는 어떤 교수들은 죄를 계속해서 범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학을 나에게 강요하였다. 나는 신학교에서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는 문을 발견하곤 더 깊은 좌절에 빠지고 말았다.
     
    신학의 중심은 마음에 있어야 한다. 전도는 정신이지 기술이 아니다. 목사의 설교는 배우의 연극이 아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도, 특별한 하늘의 계시와 영감이 없이도,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한 사랑을 맛보지 못한 사람도 신학생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신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복음 사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현대 신학교가 가지고 있는 맹점이다. 설교는 제조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바울의 글은 문법적으로 분석하고 해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되어야 비로소 바울의 사상과 경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목사의 양성은 신학교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훌륭한 종교가 중에는 신학교 출신이 많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길리얏의 야인이었으며, 그의 사업과 정신을 물려주려고 선택한 후계자 역시 소를 모는 사밧의 아들 엘리사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사 세상을 구하려고 계획하셨을 때에도, 당신의 아들을 히렐이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우게 하지 않으시고 나사렛 벽촌에 두셔서 천연계를 통하여 아들을 친히 가르치셨다. 신학교가 만들어 낸 목사야말로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위험한 원수이다.
     
    신학자와 목사가 만들어 놓은 거짓 평안
    죄의 죗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의 은혜됨을 알 수가 없다. 자기 죄의 무서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에 대한 절실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은 하지만 그 마음 속에 절실한 감사와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온 가장 큰 위험은 죄를 어쩔 수 없는 인생의 부산물로서 가르치는 것이다.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죄에 대해서 그렇게 가르친다. 그들은 죄를 도저히 승리할 수 없는 것으로 부각시킴으로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율법은 너무나 거룩해서 도저히 순종할 수 없다는 식의 설교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죄를 범하고도 그것을 심각한 죄로 생각하지 않게 되며, 따라서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죄인으로서 열렬히 구해야 할 십자가의 보혈과 은혜를 마음 속 깊이 구하지 않게 된다. 죄를 범한 죄인은 죄책감에 눌리게 되고, 죄인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께 나오도록 계획하신 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인데, 신학자들은 죄 가운데서도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신학을 고안해 냄으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죄인들의 마음에 거짓 평안을 넣어 주었다. 죄를 범한 사람은 마땅히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오직 죄를 회개하였거나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만이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죄를 생각하지 않거나, 인위적으로 율법을 폐지시킨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거나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시도는 죄를 죗되게 하지 않음으로써, 은혜를 은혜되지 않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깨달은 오해 - 죄에서 벗어나는 길
    죄란 무엇인가? 노하는 것, 도둑질 하는 것 등이 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왜 노하고 도둑질하는가? 어찌하여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일까? 악이란 음행,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원수맺기... 질투, 술주정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육체의 죗된 행위는 마음에 깃든 병이 겉으로 드러난 증세이지, 병 자체는 아닌 것인가? 많은 고뇌와 투쟁 끝에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죗된 행위 하나 하나와 싸우는 일을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는 결코 죄에 대해서 승리하거나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일 겉으로 드러난 죗된 행위 자체가 악의 본질이 아니라면, 선한 행위 자체도 선이 아닐 것이다. 이름을 날리기 위한 자선, 더 좋은 것을 얻어내기 위한 기부금은 자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반드시 선은 아니다. 야심적인 목사, 세속적인 신앙인처럼 추한 모습은 세상에 다시 없다. 선은 정신이지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선한 행위는 선이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 주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고 해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도 없다”고 증언하였던 것이다(고전 13:3).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에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담고 있다.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니 곧 하나님이시다.” 무엇이 선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선은 하나님이다”라고 답변하셨다. 선 자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알면 의인이 될 수 있다. 선을 배우면 하나님께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 선을 행할 수 없다. 종교와 도덕적 행위와 신앙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다. 한쪽을 버리고서는 다른 쪽을 이해할 수 없다. 선이 하나님이라면, 악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도둑질, 살인, 간음은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지 죄의 근본 원인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의도적으로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은 내가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결코 죄를 범할 수 없으며 죗된 생각이 나를 주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 영혼의 평안을 찾는 길, 그것은 오직 이 길 뿐이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
    신앙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양심과 성경에 근거해서 의로운 선택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교회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마음과 심령의 전적인 동의를 말한다. 그런데 마음과 심령의 하는 일은 의지와 양심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면, 양심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믿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아무리 부도덕하고 부절제한 목사라도 성경에 기록된 진리대로 순종하는 사람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설교를 하지만, 과연 몇명의 목사들이 자신이 설교하는 진리를 믿으면서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가?
     
    나의 오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갓 태어난 아기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아기는 어머니께로부터 만 가지를 받지만, 아기는 어머니께 하나도 드리지 못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우리의 신뢰 자체도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깨달았기 때문에 생긴 선물이다. 우리가 우리의 재산과 몸과 영혼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주시는 자요, 인간은 항상 받는 자이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지만, 하나님은 그분 자체가 사랑이시며 사랑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봄으로써, 그분의 사랑이 자신의 마음 속에 새겨지도록 허용해야만 한다.
     
    그렇다! 나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분의 선하심을 알았다. 그리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결심도 하였고, 어느 정도 그분의 사랑도 알았다. 그러나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분을 신뢰할 정도로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배반하는 탕자가 되거나, 비록 부모 밑에 있을지라도 의무감에서 어쩔 수 없이 순종을 하면서 마음 속에 불만이 가득한 자식으로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역시 일상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 나는 내 영혼이 구원을 받기 전에 성인의 거룩한 행위를 흉내내려고 했다. 나의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관심과 호의를 얻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선한 행위와 의로서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나중에는 나의 구원에 대해서 그분과 대등한 계약을 맺으려고 계획했었다. 나는 지음을 받은 자면서도 지은 자의 흉내를 냈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기이면서 우주의 창조 사업에 동참했던 그의 파트너나 된 것처럼 행동하였다.
     
    아, 나는 얼마나 미련했던가!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을 주려고 호소하시면서 나를 찾아오셨건만, 나는 오히려 “왜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까?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대들었던 것이다. 지나간 생애 동안에 하나님께서 나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실 때까지 기다렸던 적이 얼마나 많던가?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분의 손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나의 잘못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분의 사랑을 충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먼저 내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 나아가야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떻게 내 스스로 나를 깨끗케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 이외에 누가 나를 죄로부터 깨끗케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의 손을 놓음으로 흙탕에 빠지게 된 어린아기가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게 씻을 때까지 어머니께 올 수 없단 말인가? 사랑의 어머니는 오히려 아이가 머뭇거리면서 더디 온 것을 책망하고 곧 새옷으로 갈아 입힐 것이다.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겠는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 자꾸 눈에 보이는 특별한 기적과 은사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해 놓으신 용서에 대한 증거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십자가를 통한 변화의 길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시는 힘을 가지고 계시다. 모세의 율법을 몸에 두르고 엄격하고도 청렴한 바리새파인 다소 출신의 바울도 그 마음의 고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재능과 학식을 분토로 여기고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참회하며 용
    서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독일에 한 청년이 있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번뇌케 하여 그는 불안한 나머지 단식과 절제를 통하여 선을 쌓기 위해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쩌랴, 그가 외모를 꾸미면 꾸밀 수록 악한 생각이 끊임없이 마음에서 솟아나왔다. 그 때에 스승인 슈타우비츠의 한마디가 그에게 영감을 가져왔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은 루터의 죄를 용서하셨고 온 우주는 버림받았던 자식을 건져 올렸다. 그 후로 루터는 믿음과 성결을 강조하는 강력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지만, 오늘날 그의 후예들은 루터가 말한 믿음을 “죄를 겁 없이 범할 수 있는 보험카드”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어떠한 생애를 살던지 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나 역시 죄가 가져온 온갖 고뇌와 고통 속에서 방황하다가 모든 기력을 탈진하고 나서야 아버지의 자비만을 바라보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범한 죄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고, 내가 행한 의와 선한 행위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태초 이전부터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이루어 놓은 속죄만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이시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시고 나의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저는 이제 당신께 드릴 선행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선행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피곤에 지친 몸과 정신, 그리고 깨어진 마음 뿐입니다.” 이러한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내 영혼 깊숙히 스며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에 대하여 “너의 제물은 받아들여졌다. 너는 낡은 옷을 벗고 내가 너를 위하여 준비해 둔 의의 옷을 입어라” 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제 나의 기도에는 내 소원을 요구하는 주장이 없어졌다. 다만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간청만이 있을 뿐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넘칠 뿐이다.
     
    이제 유일한 나의 의무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의 기대는 노력과 희생에 대한 보수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에 대한 약속된 보상으로 달라졌다. 나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막대한 청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노력과 봉사에 대해서 최선의 선물로 축복해 주셨다. 먹고 입는 것에 대한 근심은 사라져 버렸고,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졌다. 오직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는 말씀에 대한 느긋한 신뢰가 생겼다(롬 8:32).
     
    더 이상 나는 의무로서 선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전도든지 자선이든지 간에 즐거움과 만족한 마음을 가지고 행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말과 생활에는 순결한 유머와 여유가 넘치게 되었고,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의미있는 희생과 봉사를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바칠 수 있게 되었다. 희생, 절제, 극기와 같은 것들이 더 이상 하기 힘든 의무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고,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를 위해서 바칠 수 있는 다시 없는 특권으로 생각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베푸신 구원에 참여하게 된 이후부터 선에 대한 의무는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고, 죄를 짓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게 되었고,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율법은 더 이상 내게 무거운 짐이 되지 않았으며, 다음과 같은 사도 요한의 말이 이해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구세주의 사업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진다. 첫째는 인류에게 완전한 생애를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는 인류의 죄를 당신 자신이 직접 짊어지심으로써 제거하시는 일이다. 전자는 최종 목적이고, 후자는 전자로 인도하는 필요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죄인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죄를 속죄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죄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진실로 용서받은 경험을 하지 못하면, 그 죄인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는 속죄의 교리를 죄에 대한 값싼 용서에 국한시킴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구세주의 모본을 쫓아서 따라가는 성화의 경험을 빼앗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를 속하셨으니 이제 나는 애써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되며, 죄를 범해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롬 6:1). 내 경우에 있어서 처음에는 모세의 율법이 부각되었고, 그 후에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다가왔다. 어떤 의미에서 율법의 엄한 밧줄로 자신을 얽어 맨 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에는 속죄의 교리를 가지고 자신의 죄와 부도덕함을 가리우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이루어진 은혜가 눈 먼 자들에 의해서 희롱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염려와 슬픔에 잠기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의를 사모하는 자들의 휴식처이지, 악인의 은신처가 아니다. 
     
    이제 나는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깊이 인식한 채 목회와 자선 사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용서가 당신의 완전하신 심판과 공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하여 그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를 깊은 멸망의 수렁에서 건져주신 그분의 은혜를 어떻게 저버릴 수 있는가? 전에는 그분의 율법에 압도 되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엄청난 은혜에 압도되었다. 하늘은 내가 가지기 원하는 모든 것을 나에게 주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인생은 한번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나는 평안과 구원의 길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길을 안 것이 반드시 그 길을 걷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단지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평안과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텔레그램으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