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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통의 골짜기를 지날때조회수 : 4297
    • 작성자 : 박진태
    • 작성일 : 2014년 11월 25일 0시 40분 24초
  • "여자가 산고를 겪으면 자기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거니와 아이를 낳으면 곧바로 세상에 사람이 난 기쁨으로 인해 다시는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16:21)"
     
    부모가 자녀를 기르며 겪는 고통을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정말 고통을 피하며 산다면 결혼해 가정을 일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결혼하고 자녀를 낳습니다.
     
    고통을 죄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불순종때문에 오는 고통도 있지만 고통이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 에덴동산의 아담도 만일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다면 통증을 느꼈을 것입니다. 질병과 노쇠의 고통은 분명 궁극적으로는 죄의 결과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고통은 훨씬 숭고한 사역을 감당합니다. 고통의 사역은 무엇입니까? 우선 고통은 정화의 위력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였은즉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는 이미 죄를 그쳤나니." 고통 자체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지만 우리가 그리스도께 복종하여 그분의 도움을 구하면 고통은 우리를 깨끗게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의 둘째 사역은 그리스도께 동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10절에서 바울은 "그분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함"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됩니다. 고통의 골짜기를 지날때 여러분과 나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일을 전부 겪은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셋째 사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일부러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분 이름을 영화롭게 하도록 우리의 고통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앞둔 시각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사 그분을 놀라운 영광으로 죽은 자 가운데 살리셨습니다.
     
    고통은 우리을 정결하게 합니다. 고통은 그리스도인을 예수님과 더 가까워 지게합니다. 고통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영광과 영예를 뜻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생각하건대 이 현 시대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많은 보상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위대한 사도바울은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육체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를 계속 겸손하고 쓸모있게 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여느 그리스도인 처럼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지 않으셨지만 그 필요는 다 채우셨습니다. 연약함과 고난이 오히려 능력과 영광이 되도록 사도바울에게 필요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내게도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전폭적으로 그분께 내어드릴 때에야 그것이 가능합니다.
     
    고난의 삶에 소망을 말하다(워렌 위어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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